디지털 몰입형 예술 전시 : 캔버스에서 스크린으로 그리고 그 너머

  문화와 사회의 변화는 우리의 삶, 예술 창작 그리고 예술 경험 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예술은 진화해 왔으며, 다양한 매체와 새로운 기술을 통해 전달되고 있다. 1960년대 이후 예술은 디지털 미디어와 결합하여 예술가에게 새로운 창작 도구를 제공하고, 관람객에게 새로운 경험 방식을 선사한다. 19세기 후반부터 과학 기술 발전은 원본 작품의 아우라를 약화시키며 예술의 대중화를…

애니멀 히스토리 호스피탈

동물이 나오는 영상물   동물이 나오는 세상의 모든 영상물들은 동물의 모습만 담겨있는 영상과, 동물과 인간이 함께 담긴 영상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이 두 분류는 다시 야생을 배경으로 한 영상과 문명을 배경으로 한 영상으로 각기 분류된다. 도식화하여 사례를 들자면 아래와 같다.   A의 경우 야생 속의 동물의 모습을,  B의 경우 야생 속의 인간과 자연의 모습을,  C의…

과시와 추종에 사로잡힐지언정 – 류성실 작가론

일등시민권   BJ 체리장은 일인 방송을 통해 자신이 일등시민권을 받았다고 말한다. 북한이 핵을 발사하는 동안에도 그동안 경고해 왔음을 알리며 예언을 허투루 취급한 당신들을 책망하고, 죽어서도 행복하려면 후원하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스펙과 능력을 과시하는 데 열중이다.   그는 꿈을 꾸면서 숫자의 비전을 보고 난수 방송을 해독하면서 그것이 위험을 예고하는 신호임을 읽는다. ‘오빠’를 통해 전해 들은 미래를…

서정이여, 다시 한 번 – 황예지의 사진

1.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너무 많은 ‘서정’이 있다. 서정은 이제 충분하다는 얘기다. ‘일상’이라는 터전, ‘내면’이라는 수단, ‘자연’이라는 이상을 꼭짓점 삼은 삼각형에 안착한 서정은, 더 이상 스타일이기보다 메커니즘으로서 소진된다. 주변의 사소한 존재를 돌아보고 보듬는, 그로써 진부한 하루에서 특별하고 소중한 감동을 낚아 올려 깨달음에 도달하는 서정의 논리는 미술 안에서 형식으로서 반복되거나, 혹은 미술 그 자체로 여겨진다. 그러나…

핑크팡이

  0.   미미는 공주다. 미미는 공주이기 때문에 상스러운 욕을 입에 담지 않고, 손등으로 숙녀 박수를 치며, 레이스와 리본으로 꾸민 자신의 왕국에 산다. 더군다나 미미는 핑크 공주다. 핑크는 공주의 색이니깐. 그는 분홍 천으로 옷을 직접 지어 공주의 품격에 걸맞게 치장하고 가꾼다. 그의 작업도 미미를 닮아 속없이 해맑아 보인다. 세상 물정 꿈에도 모르고 배시시 웃는 미미의…

유하나: 죽음과 폭력과 슬픔과 시

  인간이 소위 ‘시민사회’라는 것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도살장을 반드시 그 사회 바깥 어딘가에 두어야 한다고 (자조적으로) 말했던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로부터 시작한다. 그의 예견대로 도살장은 콜레라를 옮겨대는 배처럼 저주받고 격리된 존재이자 장소로서 저 멀리 추방당했다. 바타유의 시선은 억압당한 폭력성과 충동이 죽음이라는 긴장 상태와 교차하는 자리에 닿는다. 그에게 도살장이란 단순히 동물이 도축되는 물리적 장소라기보다, 시민사회의 가장자리에서 사회의…

바깥으로: 리크릿 티라바닛 x 이유진. 2024년 12월 12일 태국 치앙마이에서.

액세스가 있다면 적극 활용해야지. 어떤 문제의식이 있다면 관련 정보를 자세히 공유하고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플랫폼으로 활용해야지. 그러한 과정에서는 어떤 것도 ‘캔슬(cancel)’하지 않아.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어.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올바르게 살아가고 자신의 예술은 올바른 방식으로 펼쳐나가면 돼. 시위를 하고 소리 지르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야.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예술은 올바른 방식으로 펼쳐나가면 돼. 내가 사람들에게 타협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타협하지 말라는 거야. 그렇지만 처음부터 타협하지 않는다면 아마 예술가는 될 수 없겠지.

욕망을 보이는 「풍요」의 장치

문화란 우리를 싸고 있는 일상성이다. 거주, 식생활, 교통, 소통 매개, 그 매개를 움직이는 문화적 코드까지 모든 것이 일상이자 세계이다. 그런 면에서 상품의 속성들은 이 시대 문화를 노골적이고 가감 없이 보여준다. 우리는 그 속에 그것들을 이용하면서 산다. 말하자면 예술가는 감각적이거나 개념적인 세계와 맺는 관계를 그의 삶의 맥락 속에서 지속 가능한 세계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현재가 제공하는 환경에 거주한다. 그의 작업의 매개인 상품들, 오브제들은 세내어 쓰는 일시적인 사용체일 뿐이다. “예술가는 문화에 세 들어 사는 사람”[4]인 셈이다.

안락사 가위바위보

안락사 가위바위보

“이제 저 좀 죽여달라”고 사정하던 99세의 노인이 어느 날 새벽 수액줄에 목을 감아 자사自死했다. 와락 다가온 사건이었다. 마치 나 홀로 양 손으로 가위바위보를 하듯, 다음처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명이라는 추상은 절대적으로 옹호되어야 할 영역인가? 죽음을 삶의 일부로 통합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대상으로 간주할 수 있나? 질병과 고통을 이유로 안락사를 택하는 것은 목욕물과 함께 아이를 버리는 격으로 생명을 제거해버리는 우를 범하는 걸까? 질병과 고통마저 남김없이 살아내는, 생의 남은 한 방울까지 짜먹는 일은 삶의 풍부함을 누리는 행위인가? 안락사는 운명의 자기결정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정해진 운명을 앞당기는 행위일 뿐인가? 안락사의 요청은 자기 삶으로부터의 무책임한 도피인가? 아니면 자기책임의 윤리 안에서 가능한 시나리오인가?

따로국밥 상호작용 ‘우리가 남이가’

최근 문화공동체 □□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단체와 업무적으로 엮이는 일이 있었다. 그들의 독자적인 운영 방식을 보고 있자니 ‘공동체’를 어찌 이리도 당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문화예술 속 세계는 늘 그들만의 리그로 존재하는 것 같다. 일부 지식인으로 치부되는 이들의 보수성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어 새로운 목소리나 창의적인 시도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기존의 틀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크다. 일부 단체는 권력 남용을 통한 갑질을 일삼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정말로 ‘공동체’라는 이름에 걸맞은 가치를 실현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겉으로는 잘 포장된 속 빈 강정 같다. 공정한 예술 환경 조성이 그리 힘든 일일까? 그들의 무례함에 여러 번 따져 물어봐도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직도 순진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이런 단체가 한 지역을 대표하는 영향력 있는 활동가들의 모임이라는 사실이 참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