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적, 표면으로서 무빙 이미지

이제 이미지들은 유토피아를 창출하고자 하는 목표를 갖지 않는다.– 데이비드 조슬릿 [비디오] 프로젝션을 수용하자 이미지와 관람객과 주위 구조물(architecture) 간의 관계가 급격하게 달라졌다.– 에리카 발솜[1]     백남준아트센터는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생중계 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의 4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에서 백남준의 1977년 텔레비전 작업 <과달카날 레퀴엠 Guadalcanal Requiem>(1979년 재편집)을 영사(projection)했다. 관람 동선상 첫 작품으로, 적어도 그렇게 의도한 것으로…

정여름론: 역사의 탐정이 되는 법

수사착수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2020년 모두가 방 안에서 움츠러들 때, 작가 정여름은 게임 <포켓몬 고>로 역사를 탐구하는 흥미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어느 날 공동작업을 하던 피디가 우연히 용산 미군 기지 안에서 평화의 요새(Fortress of Peace)가 포켓몬 고의 평화의 포트리 마을(Fortree of Peace)로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현실의 미군 기지는 허가받은 자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반면,…

작가-렌즈-세계의 상리공생 : 송세진 영상작업에서의 물질성과 몸

0   이미지는 유리를 경유한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기록된 이미지는 영사기 렌즈를 통해 보는 이에게 전달된다. 이미지의 형성 과정에서 유리는 빛의 굴절과 투과를 통해 정확한 시각적 경험을 가능하게 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물리적 세계를 시각적으로 재현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환영(Illusion) 속에서 관객은 각자 만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을 경험하고 감각한다. 인간은 단순한…

아버지의 축복[1]- <피규어 오브 패밀리(Figure of Family)>(2023)에 대한 고찰

  부모를 거부할 때 나는 무엇을 잃는가? 나는 존재 전체를 잃는다. 부모를 통해서 오는 삶의 축복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2] 그래서 고통스럽다.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계속되고,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을 망가뜨리게 된다. 나는 바로 서지 못한다. 가족을 바로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가족 관계의 장(場)에서 누군가 배제되면, 나머지 가족 모두가 그 빈자리 때문에 고통받는다. 부재하는…

양지훈: 적정 노출의 감도

“민중들이 노출된(exposés)다.”[1]   조르주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은 민중의 노출이 과잉과 축소라는 역설적 상황에 놓여 있음을 짚으며 『민중들의 이미지』의 서문을 열었다. 스펙터클 제조기로 기능하는 현대 미디어와 매년 쏟아져 나오는 다큐멘터리에서 드러나듯이, 민중의 형상은 숱한 이미지를 통해 재현되어 왔다. 당연하겠지만, 여기에서 그들이 노출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평범한 소시민들이 가시화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때 비-민중이라고 여겨질 만한 이들은 마침내 민중의 존재를…

머피염의 브리콜라주: 설치 vs. 연극 vs. 영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의 다이앤 쿠투(Diane L. Coutu) 편집장은 ‘역경에 부딪혀도 극복하고 일어나는 힘’, 즉 복원력의 비밀을 세 가지에서 찾았다. 첫째, 냉정한 현실 직시, 둘째, 의미 창출, 셋째, 브리콜라주(Bricolage)[1]이다. 이 중에서 적절한 도구나 재료 없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즉석에서 고안하는 능력을 일컫는 ‘브리콜라주(Bricolage)’는 어원상으로도 복원력과 연관된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반등한다’라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

증언하는 이미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상작업을 중심으로(상)

  1. 들어가며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데 실패한다고 롤랑 바르트는 말하였다. 왜냐하면 한 대상에 대해서 펼쳐지는 의미란 텍스트의 몽타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텍스트에 기록된 의미 속에서 이 세계의 이야기를 추적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미지 속에서 은폐되어 있던 것을 복원시키는 과정 중에서 잠재적인 영화 이미지의 의미는 비로소 매순간 새롭게 재생산 될 것이다….

증언하는 이미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상작업을 중심으로(하)

4. 증언하는 이미지: 영화 <메모리아 Memoria>(2021)[1]를 중심으로   앞선 두 작품과 다르게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비교적 최근작품인 영화 <메모리아>(2021)는 랑시에르의 표현처럼 시청각 이미지의 재분배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조작(operation)에 가까운 작품이다. 영화는 인접예술과 매체들의 혼종적 결합을 통해서 지금도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기존의 장르영화나 흥행작들과 달리 아피찻퐁 감독의 깊은 사유 속에서 만들어진 영상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속성은 영화라는 매체가…

컨아밈의 세계

컨아밈이 기존의 멘토와 조금 다르다면, 관찰자의 자리에 서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실로 컨아밈은 익명성 뒤에 숨어서 자신을 감추려는 노력을 전혀 내비치지 않는다. 컨아밈 계정의 주인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검색하면 바로 알 수 있으며, 자신이 누구와 친한지, 어떤 사람과 결혼했는지, 얼마나 가난한지,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 안에 놓여 있는지, 얼마만큼 실패했는지에 관하여 겁도 없이 썰을 푼다. 그러니까 컨아밈은 자신이 봇이 아니라 현시창을 맛보고 있는 살아 있는 한 예술가이자 과도한 이상적 자아를 소유한 어쩔 수 없는 관종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컨아밈의 썰은 그래서 다른 게 아니라 컨아밈이란 계정을 쓰는 결함 있는 범박한 한 예술가가 살아온 방식이며, 그 예술가가 보는 미술계이며, 그 예술가 가지고 있는 예술관에서 비롯된다. 때문에 정치적 미술이나 공공미술에 대한 편견을 근거 없이 드러낼 때도, 때때로 기금을 향한 무조건적인 적의를 보일 때도, 때때로 소수자 스테레오타입을 무성의하게 희화할 때에도, 철학자를 인용하는 예술가를 조롱하면서도 자신의 인용구가 틀렸음이 탄로 날 때도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애초에 어떤 큰 진리를 여기서 얻을 수 있겠는가?

KNOW YOUR MEME, 동시대 미술이라는 밈

생성형 AI 시대 이전,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이미지 자본주의하에서 무가치함=‘쓰레기’ 이미지를 담당하던 것은 (슈타이얼의 표현을 빌리면) ‘이미지-스팸’ 존재였지만, 이제는 스팸이 아니라 슬롭slop이다. 슬롭은 “쓸모없고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인공지능 컨텐츠”를 의미한다.[28] 녹아서 흐르다가 굳은 지방, 거기에 달라붙어 엉긴 찌꺼기와 오물. 아말감처럼 항상 유동성과 접착성 이미지를 내포하는 슬롭은 유동성 시대에 걸맞은 쓰레기 존재의 최신 형상이다. 이러한 슬롭은 모델 붕괴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자기파괴를 일으킬 정도로, 데이터 유통의 ‘동맥경화’를 일으키며 원활한 유통과 흐름을 저해한다. 나아가 노출도, 트래픽 등 관심경제 하에서의 경제 활동을 위해 구글과 같은 대형 검색 사이트의 검색 엔진 최적화SEO 알고리즘을 추정하고 이를 공략하여 상위 페이지에 노출되기 위한 클릭베이트clickbait로서 막대한 쓰레기 이미지와 키워드를 담은 페이지 생성에 인공지능이 활용되기도 한다.[29] 이 경우 AI 이미지는 기묘한unheimlich 동시에 유해한 난치성unheilsam 이미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