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과 절망: 미술계의 ‘불독화’ 현상과 ‘차축붕괴’ 이후의 방향상실>

  #1. “어린 양이 제7의 봉인을 뜯었을 때, 하늘은 반시간 정도 침묵했다.”[1] (계 8:1)   #2. “우리들이 알고 있는 5천 년간의 인류 역사는 그보다 수백 배나 긴 선사시대와 어떠한 측정으로도 불가능한 미래 사이에 놓여 있다. 지상에 인류가 생존한 이후 그러한 역사란 장구한 시간에 비하여 보면 지극히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 역사는 선행하는 세계에 대하여 개방되어 있고…

<메이드 인 경상도> 띄엄띄엄 관찰기

  깔끼..? 피식대학의 <메이드 인 경상도>를 처음 봤을 때 경상도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하다. 경상도 사투리 아닌 것 같다, 혹은 재미없다. 그도 그럴 것이 경상도 사람들에게 짭투리는 그렇게 새로운 주제가 아니다. 오히려 새롭고 신선한 것은 제대로 된 사투리인데, 최근 조국이 부산을 찾아 “고마 치아라 마”를 시전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거센 파도”를 일으킨 것을 보면…

《Cryptopatriology: 환상종아버지학》 개론: 패륜의 윤리- 장벽을 허무는 장치로서의 ‘패드립’을 위하여

  극우로 유명한 일본의 만화가 쿠메타 코지는 그의 만화 <안녕 절망선생> 157화에서 “실제로 이웃나라에는 사람을 매도하는 말이 일본어의 몇 배나 있기 때문에, 마치 인사하듯 매도하니까 일일이 신경을 쓰면 끝도 없다고 하네요.”라고 말했다. 그의 만화가 가진 극우적 성격을 비판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대부분의 한국어 화자는 쿠메타 코지의 이 발언만큼은 쉽게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설령 본인은 비속어를…

강철 대오 – 오민수의 설치

마지막 파업 때 끝까지 싸운 이는노조 간부가 아니라 연극반원이었다네요―심보선, 「예술가들」(2017) 1.   때로는 가장 구태스러운 질문이 가장 전위적인 예술을 만들어낸다. 오민수의 예술이 그렇게 만들어진다고 느꼈다. 우리에게 그의 설치는 넓은 의미의 ‘참여’에 대한 투철한 인식과 옹호처럼 보인다. 화염병은 예술이 될 수 있지만, 예술은 화염병이 될 수 없다. 둘 사이의 긴장을 포기하면 예술은 사라지고 만다. 이 자명한…

오독, 사랑, 목구멍을 넘어가는 인용부호들: 김재원의 작업과 함께

“정말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게 될 때, 그 말들을 아랫입술과 이빨 사이에 보관해 놓았던 것 같다. 이 느낌은 진짜 친한 가까운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을 못 할 때 느껴졌다.”[1]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하지만 ‘나’는 십여 년 전에 일기장 종이에 눌러쓴 이 구절을 피해 갈 방법을 찾지 못했다.[2] 매번 김재원 작가의 작업을 눈앞에…

강은희 작가론 : 기술혁신 속에서

  2019년 겨울부터 사회를 위축하게 만든 코로나19(SARS-CoV-2)의 흔적은 이제 몇몇 기관과 기업에 정착된 재택근무 정도뿐인 것 같다. 아직 절멸하지는 않았지만, 2024년 5월 한국 정부는 중앙방역대책본부를 해제하여 사회가 엔데믹을 맞이하고 있음을 밝혔다. 21세기에 들어 의학 기술과 보건의료 체계가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바이러스 역시 정체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새로운 사회는 새로이 대두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주하다. 2020년대…

포스트/영화적인, 포스트/주체적인

시네마틱 vs. 시네마토그라픽   《서머스페이스 (Summerspace)》는 효과로서의 시네마틱과 기술적인 체계를 강조한 시네마토그라픽이라는 두 가지 단어를 함께 적용해 볼 수 있는 전시이다. 하나는 직역하면 ‘영화 기술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 ‘시네마토그라픽(Cinematographic)’이 있고 다른 하나는 ‘시네마틱(Cinematic)’이 있다. ‘시네마토그라픽’이 사진을 이어 붙여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협의의 영화적인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된 단어라면, ‘시네마틱’은 활동사진의 원리를 언급하지 않아도 되는 영화적이거나 극적인…

로컬리티-모빌리티: 시간의 주름을 통과하는 이미지

1. 들어가며   시작하기에 앞서 이 글에서 ‘로컬리티’는 탈-중심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으며, 종종 각별한 이미지 속에서는 로컬리티라는 개념이 탈-중심과 동의어에 가깝게 혼용되었음을 밝혀두고자 한다. 제목으로 사용된 로컬리티라는 단어의 쓰임 속에서 이미 탈-중심이 내포되었음은 물론이고 오민욱 감독(b.1985)[1]의 영상작업 속에서 지역의 역사와 서사는 흘러가는 풍경이미지를 통해 증언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감독은 우리의 근현대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이미지가 과잉될수록 권력은 짙어진다: 송예환 작가의 작품을 중심으로

  바야흐로 웹의 시대다.  눈 뜨자마자 찾게 되는 스마트폰 속 어플리케이션도 웹, 출근해서 마주하는 프로그램도 웹. 가볍게 일상 대화를 나누는 채팅부터 정보를 검색하는 사이트까지. 모든 온라인 행위에 웹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없다.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을 창시한 팀 버너스 리(Tim Berners-Lee) 또한 웹을 만들 당시 이 정도의 영향력을 갖게 될지 몰랐다고 언급하는 것만 보아도…

2024년에 영혼을 개조하라: 문화대혁명의 영화 상영에서 칸예 웨스트의 리스닝 파티까지

칸예 웨스트의 리스닝 파티는 영화 매체의 본질적인 특성, 그것이 다양한 객체들에 의해 건축되는 체험이라는 점을 명료히 보여준다. 신중국의 전영단이 마오의 신체 혹은 사회주의 이념을 스크린을 비롯해 야외 상영이 펼쳐지는 편벽하고 가난한 마을, 결정적으로 인민의 시선에 의해 구현된다는 점을 이미 증명했듯 말이다. 제임스 터렐이 만든 로덴 분화구는 칸예 웨스트가 공연하는 무대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곳은 아이맥스 영화를 위한 세트장이면서 또한 터렐 개인의 작품으로 인준받는다. 이처럼 칸예 웨스트는 포스트 시네마의 영상이 언제나 수십 겹의 의미를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에 집중한다. 그의 리스닝 파티는 앞서 말한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을 완벽히 되살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중국의 전영단이 아우라 개념을 국가-미디어-인민 삼항 관계에서 완전히 다른 종류의 감각으로 전환시켰듯 칸예의 리스닝파티 역시 우리가 종교라 부르는 것, 혹은 영화라 부르는 것, 예술이라 부르는 것의 혼종 상태를 아우라를 산출하면서 구현한다. 신중국이 마오가 절대자의 신체를 형상화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말했다. 이 신체는 묘사될 수 없는 종류의 절대이면서, 항상 복제되어 상연되는 무대였다면, 리스닝 파티 속의 칸예 웨스트는 일종의 창문이다. 스트린베리가 ‘별은 하늘에 난 구멍’이라고 인식했듯, 잡다한 사물들과 인간의 협연으로 이뤄진 리스닝 파티 속의 칸예 웨스트는 모든 시청자의 시선을 이끄는 구멍이다. 이때, 포스트-시네마적 환경에서 아우라의 개념이 재정의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문둥병을 낫게 하는 위대한 왕의 손, 어딘가에 숨어있는 머리 잘린 불상과는 달리, 지극히 비환원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은총’이자 ‘카리스마’다. 이는 언제나 칸예 웨스트의 맥시멀리즘적인 편곡이 그러하듯, 복잡성을 요한다. 혹은 지저스 이즈 킹에서 그러하듯 수많은 코러스들이 몸을 섞는 반향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다. 칸예 웨스트의 아우라는 마오쩌둥이 이미지로 재현되며, 그 절대성을 잃어버렸듯, 다양한 미디어에서 편재된다. 이는 종교적인 것이 오늘날 취한 진정한 문제, 절대적인 것의 상실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