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예 웨스트의 리스닝 파티는 영화 매체의 본질적인 특성, 그것이 다양한 객체들에 의해 건축되는 체험이라는 점을 명료히 보여준다. 신중국의 전영단이 마오의 신체 혹은 사회주의 이념을 스크린을 비롯해 야외 상영이 펼쳐지는 편벽하고 가난한 마을, 결정적으로 인민의 시선에 의해 구현된다는 점을 이미 증명했듯 말이다. 제임스 터렐이 만든 로덴 분화구는 칸예 웨스트가 공연하는 무대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곳은 아이맥스 영화를 위한 세트장이면서 또한 터렐 개인의 작품으로 인준받는다. 이처럼 칸예 웨스트는 포스트 시네마의 영상이 언제나 수십 겹의 의미를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에 집중한다. 그의 리스닝 파티는 앞서 말한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을 완벽히 되살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중국의 전영단이 아우라 개념을 국가-미디어-인민 삼항 관계에서 완전히 다른 종류의 감각으로 전환시켰듯 칸예의 리스닝파티 역시 우리가 종교라 부르는 것, 혹은 영화라 부르는 것, 예술이라 부르는 것의 혼종 상태를 아우라를 산출하면서 구현한다. 신중국이 마오가 절대자의 신체를 형상화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말했다. 이 신체는 묘사될 수 없는 종류의 절대이면서, 항상 복제되어 상연되는 무대였다면, 리스닝 파티 속의 칸예 웨스트는 일종의 창문이다. 스트린베리가 ‘별은 하늘에 난 구멍’이라고 인식했듯, 잡다한 사물들과 인간의 협연으로 이뤄진 리스닝 파티 속의 칸예 웨스트는 모든 시청자의 시선을 이끄는 구멍이다. 이때, 포스트-시네마적 환경에서 아우라의 개념이 재정의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문둥병을 낫게 하는 위대한 왕의 손, 어딘가에 숨어있는 머리 잘린 불상과는 달리, 지극히 비환원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은총’이자 ‘카리스마’다. 이는 언제나 칸예 웨스트의 맥시멀리즘적인 편곡이 그러하듯, 복잡성을 요한다. 혹은 지저스 이즈 킹에서 그러하듯 수많은 코러스들이 몸을 섞는 반향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다. 칸예 웨스트의 아우라는 마오쩌둥이 이미지로 재현되며, 그 절대성을 잃어버렸듯, 다양한 미디어에서 편재된다. 이는 종교적인 것이 오늘날 취한 진정한 문제, 절대적인 것의 상실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