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역사박물관 – 세계의 주인이 되기 위한 다섯 단계

우선 진보라는 주제부터 살펴보자. 역사가 어떤 운명 위에서 전개되는지를 역설한 헤겔의 관점은 꽤 흥미롭다. 그 생각은 일면 진보적 느낌을 자아내고 있지만, 자유라는 개념에 너무 의존하고 있어 나에게는 낯설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 역사적 원동력을 우리나라의 맥락에 더 적합한 ‘독립’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하는 것이 좋겠다. 반면, 후쿠야마의 이론은 다소 단순한 데가 있다. 전 세계가 운명적으로 자유 민주주의를 취할 것이라는 생각은 현실과 잘 맞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모든 나라를 구제한다고 단정지어서도 안 된다.[5] 현대적 맥락에서는 오히려 그 반대로 작동하는 것 같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상대적으로 앞선 다음에야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자각하는 것이다. 또한, 어떤 나라들에게 있어 민주주의는 단순히 덤일 뿐이다. 게다가 민주주의의 본질은 다양한 형태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어, 나는 중국몽을 통해 명확하게 적을 설정하는 방법을 고찰한다. 이 방법은 현재의 소속감을 보다 강화하고 도전에 맞서려는 의지를 더욱 탄탄하게 다질 수 있다는 데 그 유용성이 있다. 그러나 나는 ‘중국몽’이라는 말에서처럼 특정 국가를 연결시키는 발상에는 반대한다. 이러한 연계는 보편적인 성공 모델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동남아시아에서의 내 경험에 비추어볼 때, 특정 지역에 뿌리를 두고 강대국의 거대 서사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역사와 미래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핵심은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다. 역사는 창의적으로 다시 쓸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말하지 못한 목소리조차 차츰 들릴 수 있다. 의지만 있다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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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 Museum of History – The Five Stages to World Mastery

This essay is an edited excerpt from Hà Ninh Pham’s work-in-progress PhD dissertation titled Metaphysical Cartography for the Future. In this dissertation, he explores an imagined country called Country X, a place where “I feel a deep sense of belonging. The people of Country X come from different physical places and times, but we are…

공백의 힘

같은 영화 속 다른 장면을 보겠습니다. 버스가 유난히 험한 길을 지나는데 이번에도 주변 환경의 소리보다는 승객들의 별 볼 일 없는 물건들이 선반과 좌석에서 떨어지는 소리만 들립니다. 접시, 냄비, 프라이팬, 베트남의 보조금 경제 시기[2]와 밀접하게 관련된 물건들입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예의 그 소녀는 쉽지 않은 여정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어 구급차로 옮겨탑니다. 이때 감독은 버스 회사 이사가 차를 타고 가며 버스 기사들의 생계 개선책을 논하는 장면을 이 장면과 병치시킵니다. 소녀가 탄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는 점점 커지며 다른 소리를 압도하는데, 다소 특이한 연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사가 탄 차가 나오는 장면에서도 관객은 차의 엔진 소리나 대화 소리가 아니라 구급차 사이렌 소리만 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용된 음향 기술의 제약으로 인해, 감독은 장면의 본질을 소리로 나타내기 위한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말로는 잘 표현되지 않는 도덕의 소리와 사회적 갈등의 섬세한 묘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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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ower of the Void

This essay was transcribed from a talk by Đỗ Văn Hoàng, which took place on 19 August 2018 at Six Space, Hanoi as part of the British Council Vietnam project Heritage of Future Past. I. Film restoration, in a technical sense of the term, refers to the transferring of 35mm or 16mm film prints to…

“매듭” 풀기: 베트남 민족학 박물관 내 천주교 문화 관련 전시에서 큐레이터의 책무

  2008년 11월에 베트남 민족학 박물관(이하 “VME”)에서 천주교 문화 관련 전시가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같은 해 8월, 숙고 끝에 전시를 12월로 연기하기로 결정되었다. 그즈음, 호안 끼엠(Hoàn Kiếm) 지구) 나 쭝(Nhà Chung)가 42번지 및 동 다(Đống Đa) 지구) 응우옌 루옹 방(Nguyễn Lương Bằng)가 178번지 토지를 둘러싼 하노이 시 정부와 교회 간의 갈등은 점차 심화하여 시위가 열리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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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ying the “Knots”: Responsibilities of Curators in the Exhibition onof Catholic Culture at the Vietnam Museum of Ethnology

Back in August 2008, the plan to organize an exhibition on Catholic culture at the Vietnam Museum of Ethnology (VME) in November was carefully considered and rescheduled for December of the same year. Near that time, the tension between the church and the city government of Hanoi over land disputes at 42 Nhà Chung (Hoàn…

큐레이터를 일컫는 말들: “지암 뚜옌(Giám tuyển)”에서 “삭 뜨리엔 난(Sách triển nhân)”까지

본 글은 용어의 변화를 들여다보며 지난 20년 간의 미술사 담론을 재조명할 것이다. 베트남 근대 미술의 태동기에 여러 “외국어”가 등장했다. 2000년 이전까지 “큐레이터”는 그러한 “외국어”였으나 난데없이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외국어” 단어는 당시 미술계에서 어떻게 인식되었는가? 단어를 둘러싼 오해는 없었는가? 당시 “큐레이터”의 역할은 어떻게 정의되고 인식되었는가? 2000년대 이후, 이 “외국어”에 대한 번역어로 “지암 뚜옌(giám tuyển)”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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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Giám tuyển” to “Sách triển nhân”

The paper will begin with observations of linguistic changes as a re-examination of art historical discourse of the past 20 years. There were “foreign terms” emerging during the nascent period of contemporary art in Vietnam. Before 2000, “curator” was a “foreign term,” but it didn’t just appear out of nowhere. How was this “foreign term”…

안락사 가위바위보

안락사 가위바위보

“이제 저 좀 죽여달라”고 사정하던 99세의 노인이 어느 날 새벽 수액줄에 목을 감아 자사自死했다. 와락 다가온 사건이었다. 마치 나 홀로 양 손으로 가위바위보를 하듯, 다음처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명이라는 추상은 절대적으로 옹호되어야 할 영역인가? 죽음을 삶의 일부로 통합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대상으로 간주할 수 있나? 질병과 고통을 이유로 안락사를 택하는 것은 목욕물과 함께 아이를 버리는 격으로 생명을 제거해버리는 우를 범하는 걸까? 질병과 고통마저 남김없이 살아내는, 생의 남은 한 방울까지 짜먹는 일은 삶의 풍부함을 누리는 행위인가? 안락사는 운명의 자기결정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정해진 운명을 앞당기는 행위일 뿐인가? 안락사의 요청은 자기 삶으로부터의 무책임한 도피인가? 아니면 자기책임의 윤리 안에서 가능한 시나리오인가?

따로국밥 상호작용 ‘우리가 남이가’

최근 문화공동체 □□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단체와 업무적으로 엮이는 일이 있었다. 그들의 독자적인 운영 방식을 보고 있자니 ‘공동체’를 어찌 이리도 당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문화예술 속 세계는 늘 그들만의 리그로 존재하는 것 같다. 일부 지식인으로 치부되는 이들의 보수성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어 새로운 목소리나 창의적인 시도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기존의 틀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크다. 일부 단체는 권력 남용을 통한 갑질을 일삼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정말로 ‘공동체’라는 이름에 걸맞은 가치를 실현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겉으로는 잘 포장된 속 빈 강정 같다. 공정한 예술 환경 조성이 그리 힘든 일일까? 그들의 무례함에 여러 번 따져 물어봐도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직도 순진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이런 단체가 한 지역을 대표하는 영향력 있는 활동가들의 모임이라는 사실이 참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