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영화적인, 포스트/주체적인

고동연
2024.11.30

시네마틱 vs. 시네마토그라픽

  《서머스페이스 (Summerspace)》는 효과로서의 시네마틱과 기술적인 체계를 강조한 시네마토그라픽이라는 두 가지 단어를 함께 적용해 볼 수 있는 전시이다. 하나는 직역하면 ‘영화 기술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 ‘시네마토그라픽(Cinematographic)’이 있고 다른 하나는 ‘시네마틱(Cinematic)’이 있다. ‘시네마토그라픽’이 사진을 이어 붙여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협의의 영화적인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된 단어라면, ‘시네마틱’은 활동사진의 원리를 언급하지 않아도 되는 영화적이거나 극적인 인상을 가르칠 때 사용된다.

  우선 전시는 회화, 사진, 영상, 설치, 사운드, 텍스트(시) 등으로 이뤄져 있다. 따라서 다양한 예술적 표현을 사용하면서도 어떻게 공동의 시네마틱한 효과를 얻어낼 수 있는지에 대하여 관객의 호기심을 자아낸다. 시네마틱에 해당하는 영화적이고 극적인 효과를 공통으로 만들어내는 대신에 그 결과에 이르는 방식과 과정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기획자는 ‘서머스페이스’의 전시 제목과 기획 의도를 설명하면서 계절이 던져주는 느낌이나 인상보다는 행위에 방점을 두고 있다. ‘서머스페이스’에서 여름은 덥고 습하거나 밝고 찬란한 태양이 그득한, 즉 시각적으로 촉각적으로 신체의 노출이 심해지고 낮이 길어지면서 외부 바람, 비, 그리고 빛이 신체를 가장 많이 직접 접촉하는 계절이다. 하지만 기획자는 여름철이라는 단어 자체에 매몰되지 말고 그 시기에 만끽할 수 있는, 소위 기획자의 표현을 빌자면 그러한 잠재성을 지닌 행위에 집중하기를 제안한다.

  이때 행위란 정서나 감정에 비해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적어도 행위는 정서나 감정에 비해 단절해서 보는 것이 가능하다. 명확한 시공간의 물리적인 배경에서 특정 행위가 일어나기 때문에 주관적인 감정의 추이에 비해 행위는 관찰할 수 있다. 심지어 행위 간의 관계성, 추이도 타인이 관찰할 수 있다. 실제로 전시에서 김유자의 사진도 단편적이다. 흰 벽면에 나열된 5개의 사진은 시점이나 앵글, 사진 속 대상, 빛의 효과, 대상과 렌즈의 거리감 등 어느 한 부분에도 서로 연결되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서로 연결되지 않는 개별적 장면 편집으로 연결하고 해체하는 것이 영화가 아니던가?

  이에 필자는 기획자 유승아가 설명하고 있는《서머스페이스》의 의도를 특정 감수성이나 정서를 가리키는 영화적이라는 단어와 특정 정서를 행위로 분절해서 인식하는 또 다른 영화적 표현, 즉 ‘시네마토그라픽’의 이중적 차원에서 해석해 보고자 한다. 왜냐면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현대인이 특정 경험을 개별화해서 기억하고 기록하며 재생하는 것을 훨씬 쉽게 만들었다. 일반인들도 연속된 시간의 흐름이나 모호하게 엉켜져 있는 기억의 흐름을 분절하고 해체된 경험의 흔적으로부터 영상의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덧붙여서 숙련된 편집 기술을 갖지 않고서도 영상을 만드는 일이 매우 쉬워졌다.

  그렇다면 일반인도 영화 기술적 측면에서 ‘시네마토그라픽’한 효과를 쉽게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에 예술가들은 얼마나 다양한 방법을 사용해서 ‘영화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는가? 특히 영상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연속적이고 혼동된 느낌이나 정서를 어떻게 영화의 기술적인 편집에 견줄만한 ‘시네마토그라픽’한 방식으로 표현해 내고 있는가? 즉 영화는 회화, 사진, 시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김유자, <투명의 반복> 시리즈, 피그먼트 프린트, 알루미늄 액자, 61.4×41.4×2.2cm, 사진: 스튜디오 아뉴스 © 김유자
박보마, <여름의 기쁨, 여자들과 그의 비용>, 2024, 설치, 혼합 매체 (은, 라이싱지, 좌대, 전시장 내의 기물 외), 사진: 스튜디오 아뉴스 © 박보마

 
시네마토그라픽 1: 분절성

  “한순간의 빛, 떨림, 들이마신 숨, 물의 정적이 내 안에 남아 있다. 그게 전부다.”[1]

  고전적인 영화의 정의는 개별적인 장면을 이루는 사진이나 애니메이션의 경우 낱장의 일러스트레이션 장면을 편집하여 잇게 된다. 영화를 ‘활동사진’이라 부르는 것도 이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영화 산업이 발전되고 몽타주 이론이 등장하게 되면서 시, 공간의 추이에 따라, 혹은 그것을 거슬러서 장면을 편집하는 기술이 더 발전하게 되었고 상업영화이건 작가주의 영화이건 어떻게 장면을 재구성하고 이어 붙이는지는 영화적 스토리텔링의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다. 물론 권선징악과 같이 명확한 이야기 구조를 가진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가 따로 존재하지만, 그들 간의 구분을 짓는 일도 점차로 어려워졌다.

  《서머스페이스》의 전시 배치 방식은 비선형적이고 장르 간의 구분이 파괴되어 있다. 한 작가의 작업 사이에 다른 작가의 작업이 끼어들어서 전시되어 있다. 일종의 협업 작업처럼 보인다. 김유자의 사진 작업 사이에 박보마의 설치 작업이 자리 잡고 있다. 김유자의 사진 작업이 비교적 정갈하고 규칙적으로 흰 벽 위에 걸려 있다 보니 비정형적인 박보마의 설치 방식이 눈이 거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간섭은 영화적으로 표현하자면 흘러가는 시간에 끼어든 강조 화면과도 같다. 일상적인 상태에서 갑자기 특정 인물이나 물건을 클로즈업함으로써 예상치 못한 각도에서 리얼리티에 카메라를 들이미는 것과 같다.

  불연속성은 김유자 사진 작업의 구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사진 작업 각각의 크기가 다른 것도 다른 것이지만 의자를 쌓아 놓은 듯한 흐릿한 사진 옆에 위아래가 거꾸로 된 신체, 잠옷을 입은 여성의 모습 등이 함께 배치되어 있는데 관객의 관점에서 이미지들 사이의 전개 과정을 짐작하기 어렵다. 기획자의 표현을 빌자면 “순식간에 모양을 만들어 솟아오르고 일순간에 형체를 잃어버리기에 중심과 주변을 정의하기 힘든 파도”에 견줄만한 것인데 이것은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것으로 빠르게 교차한다기보다는 애초에 중심 자체가 부재한다는 인상을 준다. 전시된 어떤 사진도 절정에 다다른 순간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즉 이미지도 주인공이라고 뽐내고 있지 않으며 화면을 그득 매운 피사체의 모습은 답답하게까지 느껴진다.

  사진을 일렬로 배열해 놓으면, 자칫 관객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게 되어 있다. 하지만 대상의 테마, 종류, 앵글, 사진의 크기 등에 있어서 구심점이나 명확한 전개를 발견하기 어렵다. 대신 관객은 <눈을 뜨면 항상 목이 말랐고>(2023)이나 <잠의 도시>(2024), 혹은 <투명의 반복> 등의 주관적이고 모호한 제목에 끌릴 뿐이다. 나아가서 무의식에 남겨져 있던 편린이 가끔 의식을 방문하듯이 김유자의 사진 아래, 사진 중간에 배치된 박보마의 태그 <여름의 기쁨, 여자들과 그의 비용>(2023) 은 관객의 집중을 방해한다. 속물적이라고까지 느껴지는 타이틀 때문에 집중도는 더 흐트러진다. 해석할 수 있는 단서를 김유자가 한강의 소설에서 발췌해서 기획자에게 전달한 한 문장에서 찾을 수 있다. “한순간의 빛, 떨림, 들이마신 숨, 물의 정적이 내 안에 남아 있다. 그게 전부다.”[2] 작가가 느꼈던 그 계절의 경험도, 그리고 김유자와 박보마의 작업을 바라보는 우리의 경험도 특정한 순간적 인상 너머의 해석을 허용하지는 않는다.

  찰나적으로 스쳐지나간 현상이나 경험을 예술 작업에 활용하게 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김유자의 작가 노트를 살펴보자. 김유자는 차원의 이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맑은 날 전철에서 책을 읽을 때 차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종이에 반사되어 사위가 하얘지는 감각. 차원을 이동하는 순간.”[3] 여기서 차원의 이동은 특정한 경험을 보존하기보다는 날려버리고 그저 순간적 경험 그 자체에 집중하려는 기획자와 작가의 공통적 태도를 엿볼 수 있게 하는 단어이다. 영화에서 각각의 장면이 빌드업되면서 다음 장면과 이야기로 확장되는 경험과는 사뭇 대치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나하, <나아가는 여자>, 2024, 린넨에 아크릴릭, 224×365cm, 사진: 스튜디오 아뉴스 © 이나하
함혜경, <나의 첫사랑>, 2017, 싱글 채널 비디오, 사운드, 컬러, 11분 30초, 사진: 스튜디오 아뉴스 © 함혜경

 
시네마토그라픽 2: 연결성

  네가 보는 것들이 너의 얼굴을 침범한다.
  너의 얼굴은 네가 보는 것들을 침범한다.
  여름이 유리를 침범한다. (김리윤,「우리의 여기의 이것의」중)[4]

  필자는 연결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다양한 장면들을 불연속적으로 사용하더라도 메시지가 도출될 수 있으며 개연성이 없어 보이는 장면들을 잘 연결하기만 하면 새로운 이야기가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연결성은 궁극적으로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연결성이다. 실제로 이나하, 함혜경의 작업은 김리윤의 글은 김유자나 박보마의 경우에 비하여 비교적 연결성을 갖추고 있어 보인다. 달리 말하자면 일종의 패턴이 있어 보인다. 이나하의 경우 그녀의 그림을 한 벽과 다른 벽의 경계를 넘나든다. <나아가는 여자>(2024)나 <나아가는 다리>(2023)가 정확히 신체를 형상화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무엇을 재현하고 있는지 명확히 알아볼 수는 없지만 ’그녀‘가 여름에 했던 행위, 즉 신체를 뻗어서 물과 같이 보이는 주위 환경에서 드러나고 사라지고를 반복하고 있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피부색이 더 또렷이 드러나는 장면에서 그러한 확신하게 해준다.

  물론 이나하의 그림이 명확히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반복되는 푸른색의 붓질, 한 벽면에서 다른 벽면으로 이어서 설치한 방식 등은 물리적으로나 형이상학적으로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한 공간으로 다른 공간으로 시선을 이동시킨다. 관객의 관점에서 시선의 이동은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전개를 의미한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자신만의 상념을 중심으로 내적인 독백과 외부에서 펼쳐지는 장면 사이의 ‘차이’를 영화적으로 재연해 온 함혜경의 경우에도 박보마나 김유자에 비해서 관객을 덜 혼동시킨다.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인지, 아니면 타자의 경험을 통해 본인 세대가 공유하고 있는 태도를 드러내고자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함혜경은 <나의 첫사랑>(2017)에서 자기 일이나 사랑에 대한 자신만의 견해를 내놓는다. 외부의 사회적 압박으로부터 오랫동안 저항하고자 했으나 그에 대한 확신조차 지니지 못했던 주체가 서서히 이제 목소리를 되찾고 있는 과정을 보여준다. 단편적으로 머리를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대화는 하나의 이야기로 완벽하게 귀결되지는 않지만, 사회적 성공, 인정의 위협이나 유혹을 떨쳐버리고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었는지 공공의 영역에서 나지막이 내뱉는다.

  독특한 이음새의 측면에서 전시를 위해 쓰인 김리윤의 시를 다시 읽어봐야 한다. 「우리의 여기의 이것의」라는 제목은 어느 것 하나 종결되지 않은 “의”로 연결되어 있다. 모든 존재가 서로에게 기대고 엮이고 연결된 채로 존재의 불안정성을 안고 살아간다는 주제가 김리윤의 시 제목에서도 잘 요약되어 있다.

  하지만 이때 연결성은 함께 주체와 환경이, 나와 타자가 무엇을 함께 극복해 나가기 위해서 연결된 상태를 지칭하지는 않는다. 김리윤의 시로 돌아가서 주체가 바라보는 외부 환경은 계속 주체를 침범하고 동시에 주체도 환경과 대상을 침범한다. 영화의 기술적인 측면에서 이야기하자면 존재가, 단어가, 문장이, 그리고 장면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특정한 결과나 성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힘을 합치지는 않은 상태이다. 단지 서로서로 계속 침범하면서 함께 엉켜져 있을 뿐이다.

포스트시네마와 새로운 인간 조건

  포스트라는 단어는 언제나 유의미하다. 새로운 미학적, 철학적 태도가 등장할 때마다 기존의 것이 애써 지켜온 범주를 확장하기 위하여 새롭게 질문을 던지기 위하여 포스트라는 단어가 종종 사용됐다. 그렇다면 시네마의 경우는 어떠한가? 장면과 장면의 독특한 이음을 통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을 부단히 변화시켜 온 영화적(시네마토그라픽)인 비평적 관점에서 보자면 《서머스페이스》의 전시 방식은 기존의 미학적인 룰에 무심하다. 아니 그러한 규정이 애써 만들고자 하였던 이야기 창조 방식에 무심하다.

  단순히 비선형적인 이야기를 파괴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함혜경의 독백은 반복되기는 하지만 일간 개연적이고 논리적인 구조를 지닌다. 이나하의 회화는 풍경 속에 녹아든 자기 신체를 그리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성은 현 미술계의 중요한 소재이기도 하다. 이나하의 그림에서 신체가 물결에 지속해서 침투받고 있는 양상은 포스트휴먼 시대, 혹은 새로운 물질의 시대의 담론을 연상시킨다. 더 이상 인간은 주위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우위에 놓을만한 도덕적인 명분을 지니지 못한다. 아니 의지조차 없다.

  나아가서 비선형적인 구조를 부정하고 있는 김유자의 사진 시리즈나 박보마의 설치 작업이 딱히 파격적인 정치적 입장을 갖는다고 보기도 어렵다. 모든 것을 그녀의 비용으로 환원해버리는 박보마의 태도는 오히려 자조적이다. 심지어 김리윤의 시는 암울하다. 무엇이든 주체가 바라보는 것은 주체의 온전함을 훼손하고 마찬가지로 환경은 주체가 바라보는 순간 오염된다.

  그렇다면 영화적인 스토리텔링을 연상시키는 문학적이고 영화적인 《서머스페이스》는 왜 이다지도 암울할까? 만약 인간이 자신의 영역과 정체성을 온전히 정하고 숙고할 수 없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면 전달해야 할 이야기도, 혹은 파괴해야 할 영화적인 수법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단지 본인들에게 주어진 주체의 순간적 인식, 문장, 이야기의 파편을 버리지 않고 쌓아 놓을 뿐이다. “한순간의 빛, 떨림, 들이마신 숨, 물의 정적이 내 안에 남아 있다. 그게 전부다.” 매우 허무하고 슬프면서도 처절하게 현실적이다. 인간은 세상과 자연에 연결되어 있지만, 자연이 인간에 무심하듯 인간도 외부 환경에 무심해지기로 결심하였다.[5] 이야기를 통하여 의미를 부여하고 연결되기를 거부하였다. 대신 찰나적으로 신체를 전율하게 하는 느낌의 기억만을 진실로 받아들이기로 하면서 말이다.

  * 이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 지원 특별 기고로 게재되었습니다.


[1] 해당 문장은 전시를 준비하던 중, 김유자 작가가 기획자에게 전달한 한강의 『노랑무늬영원』(2012) 에 나오는 문장이다.

[2] 앞의 글.

[3] 김유자, 작가 노트, 2023.

[4] 김리윤, “우리의 여기의 이것의,” 2024. 기획자 제공.

[5] 기획자의 말을 빌자면, 주어진 상황에서 “기꺼이 살아가고 의연하게 대응하는, 가엽고 사소하지만 대단한 힘을 은유”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기획자와의 이메일 인터뷰, 2024년 7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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