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하는 이미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상작업을 중심으로(상)

조은비
2024.11.10
<증발 vapour>(2015)
<Night Colonies>(2021)
<Memoria>(2021)

 
1. 들어가며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데 실패한다고 롤랑 바르트는 말하였다. 왜냐하면 한 대상에 대해서 펼쳐지는 의미란 텍스트의 몽타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텍스트에 기록된 의미 속에서 이 세계의 이야기를 추적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미지 속에서 은폐되어 있던 것을 복원시키는 과정 중에서 잠재적인 영화 이미지의 의미는 비로소 매순간 새롭게 재생산 될 것이다. 지금까지 텍스트의 명료성에 비해서 지금까지 오랜 시간동안 모호하다고 의심받아 온 이미지야 말로 이 세계를 현존시키는 현존의 한 방식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지들의 통합체(imagery)’로 구성되어 있는 영화를 볼 때마다 자연스럽게 관객의 지각 속에서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의미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세계의 의미는 언제나 유동적으로 움직이며, 그것은 마치 바다 위의 표류목과도 같은 조각들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때문에 결국 우리에게 감각적인 환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미지의 다의성, 즉 모호성이다.

  사실 영화의 시작은 즐거움이었다. 영화는 이미지들의 연쇄 작용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문자 해독력과 학문적 이해도가 없더라도 많은 대중들에게 공감 받을 수 있었다. 즉, 일종의 공동체험이 중요한 경험으로써의 예술이다. 모두에게 평등한 시청각 자료로 관람객을 맞이하였다. “한국에서는 1899년에 처음 영화가 전해진 이래 과도기를 거쳐 1923년에 최초의 극영화가 제작되었다.”[1] 이후 대중들은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정서에 공감하며 타인과 함께 모여 감응하는 즐거움, 이른바 영화를 봄으로써 공동체 체험을 경험하게 되었다. 영화만의 특성 중 하나는 영화는 다른 예술에 비해 “매우 대중적이고 민주적이며 시대와 사회를 포괄적으로 반영하는 예술이라는 점일 것이다”[2]

  이후 극장은 오랜 기간 불온한 공간으로 인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극장에서 함께 영화를 보면서 현실에서 극복되지 못했던 눈물과 갈등, 그리고 사랑과 웃음이라는 삶의 어렵고도 곤란한 수수께끼들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영화는 철저히 관객의 부동성에 의존하고 있다. 관객은 스크린 앞에서 부동적이며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상활 속에서 영화관 극장문화와 미술관의 전시공간을 넘나들며 세계적으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미술관과 영화관의 넘나드는 영상이미지의 역량을 다시금 살펴보고자 한다. 아피찻퐁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의 비가시적인 사건을 가시화시키고, 불명료했던 현재에 직면하여, 역사 속에서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고, 가장된 것을 다시금 열어 보이려고 한다,

  세계는 기록된 텍스트로써의 역사가 아닌 이미지의 속성이기도 한 잠재성의 역사로 끊임없이 새롭게 기록되고 또 생성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를 인식하는 감식안은 ‘내’가 서 있는 ‘지금’ 그리고 ‘여기’라는 현상을 인식하고 재조합하는 과정 가운데서 성립된다. 이 세계를 기존의 거대담론과 미시서사로 파악하려는 이분법적 사고의 틀을 벗어나서 잠재적인 영상이미지를 재사유하며, ‘몫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다시 기입하는 과정 속에서. 그렇게 소외된 자들을 기억하려는 잠재성의 역사로 잠재적 영화 이미지를 해석하는 연구에서부터 망각된 역사는 다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기록되어 고정된 텍스트가 아닌 매순간 새롭게 읽혀지는 이야기와 그 속성이 어딘가 닮아 있다. 역사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헤로도토스가 집필한 『역사』에서 패전한 왕에 관한 역사(이야기) 중 한 대목을 보고[3] 벤야민은 ‘나라를 잃게 된 페르시아 왕의 슬픔은 거대한 고통은 정체되어 있다가 이완의 순간에 터져 나오는데 왕의 슬픔은 페르시아 왕이 자신의 하인을 본 순간이 바로 그 이완의 순간이라고 말한다. 왕이 하인을 보는 순간 긴장이 풀어졌고 그래서 슬픔을 드러냈다’는 것이다.[4] 벤야민은 『역사』에서 기록된 텍스트를 보고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유동하는 ‘틈’의 공간을 이야기꾼의 눈으로 엿보았던 셈이다.

  잠재성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에는 거창한 방법론이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보다 우리 앞에 펼쳐진 가상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이미지들의 연쇄작용인 이미저리, 즉 영상작업을 경험한 관(람)객은 극장 혹은 전시장을 나서면서 차츰 변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껏 숨겨져 왔던 존재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이해하게 된 순간, 역사에서 은폐되어 있었던, 즉 망각된 역사는 다시 영상언어로, 즉 증언의 형태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2. 구체적이지 못한 이미지 : <증발 vapour>(2015)[5]을 중심으로

  영상작업을 감상하면서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시공간의 간격이 멀면 멀수록 그러한 모호성을 인식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이야기를 읽어낼 수도 있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Apichatpong Weerasethakul, 1970) 감독은 영상작업 <증발>을 통해서 수증기와도 같은 연기 속에 숨겨진 현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며 관객이 경험하는 이미지가 단순히 망각된 존재들의 일차원 적인 나열이 아님을 관람자에게 제안한 작품이다. <증발> 속에서 절제된 모션과 잠재적인 현실 이미지들은 병렬적으로 제시되지 않았다, 오히려 공간의 깊이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입체적인 질감으로 화면을 가득 채웠음에도 여전히 태국의 역사 속에서 ‘몫 없는 자들의 이야기’를 다시금 기억하길 바라고 있다. 때문에 <증발> 속에서 연기에 쌓여서 확연히 구분되지 않았던 이미지는 태국의 현대사에서 잃어버린 이름과 비가시화되고 있는 이들의 현재를 있는 그대로 포착해주고 있는 것[사진 1]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영상작품 <증발>에서 구체적이지 못한, 지시대상과 이미지 사이의 관계성이 희박화 된 시청각적 혼합 이미지를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누군가의 역할로 담겨진 것인지 혹은 낯선 존재가 어떻게 찍혔는지, 구도가 판별이 안 되기 때문이다. 즉 이미지 속에 거주하고 있는 존재의 위상학을 판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미지를 마주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 순간 이름 없는 자들의 형상을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될 것인가? 아피찻퐁의 극단적인 영상 속에서 생성되는 질문들을 대면하게 되는 순간에서부터 이 글의 의미는 비로소 다시금 시작될 것이다.

3. 이접된 이미지 : <Night Colonies>(2021)[6]를 중심으로

  감독은 <증발>과는 극단적으로 다른 실험적 경향을 선보였던 <열방의 방>(2015)에서의 확장된 이미지로서의 영상설치 경향을 다시금 미니멀한 재배치로 바꿔나가고자 했다. 그러한 흐름 중에서 단연 두드러졌던 작업이 바로 2021년에 제작된 약 14분 길이의 영상작업 <Night Colonies>였다. 이 작품에서 감독은 인물과의 서사에 집중하지 않고 오로지 영상을 제작하는 장치적 배치(Dispositive)[사진 2]를 통해 공동체의 미래를 증언하고자 했다.

 
  14분의 짧은 영상 길이에서도 추론할 수도 있겠지만, <Night Colonies>는 하얀 침대 근처에 설치된 조명 주위로 몰려드는 수백 마리의 벌레의 움직임을 담아내는데 감독은 혼신의 힘을 쏟은 것만 같은 작품이다. 그렇지만 영상 속에서의 벌레들의 움직임을 추론할 필요도, 스크린 속에 배치된 조명, 침대, 대상 간의 구성요소의 관계성에서 작품의 의도를 찾아내는 것도 적절해보이지 않는다. 다만 감상자의 위치에서 추론할 수 있는 부분은 본 영상의 제작시기를 염두해 본다면 이 영상이 세계적인 감염병에 대한 알레고리가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즉 <Night Colonies>는 모방으로서의 이미지 속에 기입된 서사의 역량이 중요한 영상작업이 아니다. 오로지 벌레 소리와 움직임 사이에서 믿을 수 없이 기이한 풍경에 집중하며 그 속에서 관람객의 감각이 확장되는 경험이 중요하다. 조용한 전시장에서 수 백 마리의 우글거리는 벌레소리에 귀를 기울이다보며 침대 밖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을 감지할 수 있다. 스크린에 깊이를 부여하는 것이 시각이미지가 아닌 청각이미지라는 점에서 이 영상작업의 의미를 재발견할 수 있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소음들의 층위를 다시금 살펴보는 것, 거기에서부터 무한히 반복적으로 재생되던 영상은 새롭게 인식될 수 있었다.

  재현의 논리에 의해 발전된 서양 회화의 역사, 그리고 회화 이후 등장하게 된 사진, 그리고 영화 이후의 동시대 영상작품은 이제 유성과 음향 그리고 음악적인 것과 사운드 사이의 배치를 통해서 새로운 용법에 대한 실험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 장치적 재배치의 효과와 재현의 역사 이후에 도래하게 될 새로운 이미지 활동이 구축하려는 것은 ‘앞선 것을 종료하고 뒤이은 것을 개시하는 유리수적 절단에 의해 연쇄되는 것이 아니라, 둘 중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그 자체로 가치를 갖는 이미지의 무리수적 절단(틈새) 위에 재연쇄’되는 기억되어야만 할 역사일 것이다. 때문에 감독은 더 이상 인물 위주의 재현에서 이미지의 역량을 기대하지 않는 것만 같다.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는 이미 자크 랑시에르보다 먼저 자신의 저서 『시네마 2: 시간-이미지』에서 프랑스의 영화평론가, 세르주 다네의 글을 인용하며 영화 속의 시각이미지와 청각이미지의 ‘유착’현상을 통해서 이미지의 구성방식을 연구한 바 있다.

  이렇게 동시대 영상작업 속에서 새로운 이미지 체제가 구축하는 것은 ‘앞선 것을 종료하고 뒤이은 것을 개시하는 유리수적 절단에 의해 연쇄되는 것이 아니라, 둘 중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그 자체로 가치를 갖는 이미지의 무리수적 절단(틈새) 위에 재연쇄’되는 기이함이다. 그러므로 무리수적인 절단은 연접적인 가치가 아닌 이접적인 가치를 갖는다 할 것이다. 무리수적 절단은 새로운 유성의 단계, 즉 벌레들의 우글거림과 창문 밖의 웅성거림을 동시에 제시하며 새로운 음향의 형상을 함축적으로 재현하고자 한다. 더 이상 음향적인 것과 시각적인 것 사이에서 나타나는 충돌과정이나 편집효과가 아니라 시각적인 것과 음향적인 것 안에서, 그리고 이 둘의 수많은 접속 속에서 나타난다. 시-청각적 이미지들은 구별을 식별 불가능한 것으로, 그리고 이러한 양자택일은 이 세계의 역사를 섣불리 결정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7]

  그러므로 <Night Colonies> 영상 속에서 발견되는 시청각적 무리수적인 절단 과정은 연접적인 가치가 아닌 이접적인(disjunctive) 가치 속에서 획득될 수 있다. 이러한 이접적인 역사기술(describe)법은 더 이상 음향적인 것과 시각적인 것 사이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인 것과 음향적인 것 안에서,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수많은 접속 속에서 나타날 수 있다. 확장된 잠재적 영화 이미지 속에서 발견되는 시-청각적 이미지들은 기존의 역사적 구분법을 식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었으며, 재현의 역사는 이미지의 해석적 역량을 무능하게 만들 뿐이다. 이제 자연스럽게 영상작업 <증발>의 모호한 이미지에서부터 시작한 궁금증은 영상설치작업인 <Night Colonies>의 이접적인 이미지, 그리고 나아가 장편영화 <메모리아> 속의 증언하는 이미지를 통해서 감독의 세계관을 확장시켜 보고자 한다.

  – 증언하는 이미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상작업을 중심으로(하)에서 이어집니다.

  * 이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 지원 특별 기고로 게재되었습니다.


[1] 백문임, 「조선 영화의 ‘풍경의 발견’ : 연쇄극과 공간의 전유」, 「조선 영화의 ‘풍경의 발견’ : 연쇄극과 공간의 전유」, 『동방학지』, 158권, 2012, p.242.

[2] 백문임, 위의 논문, p.245.

[3] “이집트 왕이 페르시아에 패해서 붙잡혔을 때 페르시아 왕은 포로가 된 이집트 왕에게 모욕을 주고자 했다. 그는 승리한 페르시아의 개선행렬이 지나가는 거리에 이집트 왕을 세워둘 것을 명령했다. 그의 딸인 공주가 하녀가 되어 물동이를 지고 우물로 가는 모습을 지켜보게 했다. 모든 이집트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슬퍼했지만, 이집트 왕은 눈을 땅 위로 떨어뜨리고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다음에는 그의 아들이 처형당하기 위해 행렬 속에서 끌려가는 것을 보게 했다. 이번에도 그는 꿈쩍도 하기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나 뒤이어 왕의 하인인 늙고 불쌍한 남자가 포로 행렬 속에서 끌려가는 것 알아차린 순간, 이집트 왕은 손으로 머리를 치면서 가장 깊은 슬픔을 나타냈다.” 헤로도토스, 『역사』, 천병희 역, 숲, 2009.

[4] 발터 벤야민, 『서사 / 기억 / 비평의 자리』, 최성만 역, 길, 2012.

[5]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증발 vapour>, 무성 영상작품, 상영시간 21분, 2015년 제작(태국/한국/중국).
: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 2015년에 제작한 영상작업 증발은 태국의 마을의 모습을 포착하였으며 제작된 영상의 길이는 21분이다. 영상의 스타일은 마치 흑백 무성영화의 모습을 표방하고 있으며, 아피찻퐁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특히나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에서의 모호함과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제안한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감독이 거주하던 태국 매람지구 통화마을에서 일어난 일을 담아낸 무성영화이다. 한국에서는 2015년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초연되었으며 상영당시 기타리스트의 실황연주 음악과 함께 공개되었다.

[6]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Night Colonies>, 영상설치작품, 상영시간 14분, 2021년 제작(태국).
전시정보 https://www.centrepompidou.fr/en/program/calendar/event/NqkNULH

[7] 질 들뢰즈, 「1. 운동에 관한 논제들 – 베르그송에 관한 첫 번째 주석」, 「4. 운동-이미지와 그 세가지 양상 – 베르그송에 관한 두 번째 주석」, 『시네마 1 : 운동-이미지』, 유진상 옮김, 시각과 언어 2002, 『오큘로(Okulo). 2: 이미지, 먼지와 기념비 사이에서』, 미디어버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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