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가 과잉될수록 권력은 짙어진다: 송예환 작가의 작품을 중심으로
바야흐로 웹의 시대다.
눈 뜨자마자 찾게 되는 스마트폰 속 어플리케이션도 웹, 출근해서 마주하는 프로그램도 웹. 가볍게 일상 대화를 나누는 채팅부터 정보를 검색하는 사이트까지. 모든 온라인 행위에 웹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없다.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을 창시한 팀 버너스 리(Tim Berners-Lee) 또한 웹을 만들 당시 이 정도의 영향력을 갖게 될지 몰랐다고 언급하는 것만 보아도 웹은 작은 거미줄 하나에서 시작돼 커다란 집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실제로 감각하는 것은 웹이 아니다. 웹이라는 거대한 네트워크의 거미줄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이다.
지금 당신이 겪고 있는 현재 환경부터 들여다보자. 당신은 비평이 게재되었다는 정보를 스크린 위에 떠 있는 글자로 접했을 것이며, 게재된 글을 읽기 위해 사이트를 마주했을 것이다. 그리고 제목이 적혀있는 하나의 링크를 클릭했을 것이며, 그 모든 과정을 거쳐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는 데에 당신이 본 것을 나열해 보자. 자음과 모음이 결합된 글자라는 이미지, 그 글자로 이루어진 사이트라는 이미지, 그리고 흰색과 검은색이 배열된 비평문이라는 이미지. 이 모든 것을 이어주는 매개는 웹이 맞지만, 우리가 감각하는 것은 결국 이미지로 귀결되는 것이다. 버너스 리 또한 멋을 위해 URL 입력 방식을 ‘http:’에 슬래시 두 개를 붙여 ‘http://’로 지정했다는 것만 보아도 이미지를 감각하는 시각이라는 것은 이렇게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서두에 등장한 ‘웹의 시대’는 ‘이미지의 시대’와 동의어라고도 보인다. 웹이 이미지일 때, 그것은 매력적인 시각이 될 수 있다는 점은 송예환 작가의 작품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송예환은 웹 사이트의 디자인이 스마트폰, 노트북, 태블릿PC 등 사용하는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것에 흥미를 느껴 웹 디자인을 시작한 웹 아티스트다. 작가를 웹 디자이너가 아닌 웹 아티스트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이유는 작가가 디자인하는 웹 속에 내재된 메시지 및 웹에 대한 애정과 관찰을 기반한 통찰에 있다. 작품으로서의 웹 이전에도 디지털 포스터, 웹 디자인 등을 통해 독창적인 웹 제작을 시도한 작가는 제스처에 따라서 반응하는 웹 인터페이스를 통해 사용자와 웹과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시도한다.
눈에서 뺨으로 손가락을 훑으면 ‘Cry’ 혹은 ‘Don’t Cry’가 나타난다. 반복적인 행위를 진행할수록 웹사이트의 창은 화면 아래에 축적된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가 행해지는 환경 또한 웹이다. 이 작품은 송예환이 직접 고안해 낸 웹 구조 안에서 이루어지는 웹 퍼포먼스 <Cry Don’t Cry>다. 작가는 본 작품을 비롯해 입의 크기에 따라 창의 화면이 그에 맞추어 움직이며 ‘Speak’에서 ‘Don’t Speack’을 반복하는 <Speak Don’t Speak> 작품부터 물총으로 화면에 물을 쏘면 물의 길을 따라 흰색 모양을 그리는 <Soft Pocking> 등 다양한 방식을 활용한 퍼포먼스 웹아트를 선보이고 있다. 마우스, 키보드라는 입력과 출력의 관행을 벗어나 물총의 물, 막대의 움직임, 혹은 매개를 거치지 않고 신체의 움직임으로 반응하는 송예환의 웹은 개인과 웹을 연결하는 인터페이스의 자유를 부여한다.
송예환의 작품들 안에서 웹은 우리에게 익숙한 일반적 웹과는 다르다. 정보를 얻거나 혹은 온라인 세상과의 연결을 위한 웹이 아닌, 웹과 사용자 둘 사이의 사적인 관계 맺음, 그리고 그를 통한 시각적 이미지 도출로 작용한다. 어떠한 정보를 얻기 위함이 아닌, 웹과 개인의 상호작용에 집중하는 송예환 작가의 독립적인 웹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마샬 매클루언(Marshall McLuhan, 1911~1980)의 ‘미디엄(매체)은 메시지다.’를 떠올리게 한다.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인 매체 자체가 메시지를 갖고 있다는 이 명제는 매체가 가져오는 세계의 변화에 주목한다. 이를 송예환의 웹 인터페이스에 대입해 보면, 새로운 반응형 웹은 일반화된 웹이라는 규제의 표피를 걷어내고 다양한 방식으로 확산하는 능동적인 인터넷 환경을 강구하는 하나의 메시지가 된다. 즉, 송예환은 웹 디자인이라는 시각 이미지를 활용해 웹이 가진 한계, 그리고 그 한계에서 오는 불편함을 인지하지 못한 채 주어진 틀에 자신을 맞추려 하는 사용자들의 웹 활용 행태를 비판적으로 발언하는 것이다.
<월드 와이드(World Wide)>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글을 열어보자. 본 작품은 개인의 환경, 문화적 차이를 배제하고 만들어지는 웹 플랫폼에 일반화를 지적하는 작품이다. 폼 보드 위로 프로젝션 되는 이미지는 우리가 흔하게 사용하는 온라인 플랫폼들에 업로드 후 다운로드함으로써 모두 다른 압축 형식으로 변화된 영상이다. 여기에서부터 작가는 우리가 보는 이미지가 모두 같은 것이 아님을 시각화한다. 프로젝션 되는 이미지들이 모두 같은 사이즈가 아니며 겹쳐지거나 확대, 축소되는 것 또한 우리 모두가 다 다른 환경에서 웹을 보고 있다는 메시지를 암시한다. 중요한 것은 이 이미지 사이에서 같은 철로를 빙빙 도는 ‘마우스’다. 이 마우스는 웹을 서핑하는 사용자다. 작품은 결국 웹이 모두에게 공평한 듯 보이지만 거대 권력의 굴레에 갇혀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음을 표현한다. 앞서 언급한 매클루언 또한 인간은 미디어 속에 살면서 무의식적으로 미디어에 침식될 수 있음을 제기했다는 점은 그가 미디어 이론을 개진한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기술 권력에 대한 우려와 문제 제기는 시대가 변해도 중요한 논지로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를 현혹하는 ‘웹의 권력’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인터넷의 등장은 개인이 다양한 정보들에 접근을 가능케 하면서 국가와 정부가 가지고 있던 정보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장치로 작용했지만 또다시 정보는 국가와 정부 혹은 거대 기업에 의해 검열되고 통제되고 있다. 구글(Google) 사이트를 예로 들어보면 이해는 더 쉽다. 구글 검색창에 얻고자 하는 정보를 검색하면 우리는 다양한 웹 사이트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페이지와 마주한다. 페이지들은 위에서 아래로 나열되며, 정보의 양이 많을수록 페이지 수는 커진다. 나열되는 과정에서 정보는 가장 많이 노출되는 정보와 그렇지 못한 정보 사이의 격차가 발생한다. 이는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정보의 한계로 이어진다. 결국 우리는 모든 정보를 제공받은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 우리가 제공받은 정보는 그런 ‘척’을 하는 제한된 정보라는 것이다. 본 사례는 미디어 이론가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 1947-)가 제기하는 ‘정보격차’의 논의다. 그로이스는 디지털 권력에 의해 나타나는 동시대의 이상과 실현의 괴리에 주목한 이론가다. 웹 사이트 내의 우위 관계와 보편성의 부재에 대해 언급하는 그는 구글이 철저히 형식화되고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접속 규칙으로 전 세계와의 대화를 규제한다고 보았다. 팀 버너스 리 또한 2014년 웹 탄생 25주년을 기념하며 인터넷의 개방성 및 중립성이 정부, 기업 같은 거대 권력의 공격에 위협을 받고 있음을 주장하며 인터넷 권리 헌장을 구축해야 함을 제안한 바 있다. 간단한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우리는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유토피아에 가려진 ‘디지털 권력’이라는 틀 안에 갇혀있다.
그로이스는 정보격차의 한계 극복의 어려움 속에서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에 대한 유토피아적 이상, 즉 사회적 공간의 정체성을 지나 해방된 단어의 자유로운 이동을 위한 투쟁을 주창한다. 여기서 유토피아적 이상은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에 보편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우리의 동시대적이고 일상적인 투쟁을 정의하는 것이다. 이는 웹의 형식과 구조에서 오는 한계를 인지하고 이러한 문제점을 짚어내고자 ‘개인적인 웹’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송예환의 작품 속 메시지와 맥을 같이한다. 차이점은 그로이스가 정보 자체에 집중했다면, 송예환은 웹 사용 환경 속 격차를 주시했다는 점이다. 송예환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웹과 UX·UI 디자인을 작업의 주 매체로 사용하는 과정에서 디자인이 지닌 형식적, 구조적 한계점을 깨달았다고 언급한다. 작가가 주시하는 이 한계는 우리가 사용하는 웹의 환경이 영단어의 나열, 아이콘 등 웹의 기능을 원활하게 활용하기 위해서는 웹 사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의 기준으로 일반화한 것인지 모를 이러한 웹 디자인에 의해 사용자 간의 활용 격차가 발생한다. 여기에서 권력은 웹 사용법이 이를 활용하는 개인이 아닌, 정부 및 기업과 같은 제공자에 의해 결정되며 개인은 이를 따르는 것과 따르지 않음으로써 정보에서 배제되는 두 가지의 선택권만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결과적으로 웹 환경의 격차는 그 안에 포함된 정보를 제공받을 수 없게 됨으로써 정보격차까지 연쇄적으로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더 큰 정보 권력을 경험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누구의) World (얼마나) Wide Web>은 미국과 유럽의 법을 모방하는 한국 디지털 환경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담은 작품이다. 여기에서 다시금 팀 버너스 리의 월드 와이드 웹이 재고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도메인은 모두 ‘www’로 시작한다. 이 도메인을 작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영문 전환 키를 눌러야만 한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만 이메일 주소부터 작게는 인스타그램의 계정명까지 모두 영어를 사용해야 함에도 우리는 그 안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송예환은 그러한 안일함, 혹은 무지 속에 가려진 진실을 극장이라는 형태로 발언한다. 한문 키보드 형태로 지어진 극장은 마치 우리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거대 자본, 권력이 만들어내는 픽션에 몰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프롬포트는 소셜 미디어, 인터넷 환경의 문제점을 친절한 어조를 사용하여 짚어낸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인터넷은 우리를 하나로 연결(connect) 합니다.’는 구성된 단어의 조합이 모두 긍정적이지만, 인터넷이 우리를 (강제적인 틀을 활용해) 연결한다는 숨겨진 반어적 표현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디지털 권력은 작가의 작업에서도 나타나듯 장기간 축적된 보편적 웹 사용에 현혹되어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도 인지하지 못함에서 발생한다.
송예환 작가는 이렇듯 획일화된 웹을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이는 대중의 웹 사용 행태에 주목하여 웹이 가지는 한계를 가시화한다. 작품에서 웹은 하나의 권력이며, 작가의 작업 행위는 그 권력에 저항하는 개인의 메시지다. 작가는 이 독립적인 메시지에서 출발함으로써 인터넷 환경에 거주하는 사용자들에게 간과한 불편함, 불안을 계속해서 인지시키려 한다. 그렇다면 대중은 왜 이러한 문제점을 간과하고 있을까. 작가는 그 이유가 기술적 유토피아주의에 있음을 주목한다. 새로운 미래와 시대를 기술의 발전이 열어줄 것이라는 기술 낙관적인 유토피아는 4차 산업혁명까지 기술에 의해 발전한 세상을 보았을 때, 그 주장이 타당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발전 과정에서 사회구성원 사이의 불균형과 정보 감시와 같은 문제가 심화될 수 있다는 디스토피아의 입장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 디스토피아가 주시하는 문제점을 해결할수록 유토피아의 이상향은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점이다. 결국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기술의 편리함으로 인간의 긍정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동일한 이상향으로 향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송예환의 웹 풍자 및 비판은 더 나은 웹 환경을 만들고자 하는 디스토피아 외형의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송예환 작가의 ‘지금 우리가 만들어가는 인터넷이 정말 우리가 원하는 인터넷일까?’라는 질문을 인용하며 글을 매듭짓는다. 인터넷으로 접하는 세계는 일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관점에서 더 이상 가상이 아니게 되었다는 논의가 이루어진 지 오래다. 우리는 생활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검색엔진 서비스와 OTT 사이트를 사용한다. 끝도 없이 쏟아지는 짧은 영상들을 손가락으로 쓸어가며 뇌를 절이기도 일쑤다. 하루에도 수십 개, 많게는 수백 개에 달하는 정보들을 접하다 보면 정보를 이해하는 것보다 정보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해지는 주객전도의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 어느 때보다 디지털 시각이 중요해진 시기. ‘아는 것이 힘’이었던 시대에서 ‘보는 것이 힘’으로 변화한 시대에 우리가 보는 정보는 진짜 자유롭게 주어지고 있는가. 이를 간과할수록 우리는 기술의 디스토피아로 향하는 거미줄에 달라붙어 잡아먹히길 기다리는 먹이가 될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 이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 지원 특별 기고로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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