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yptopatriology: 환상종아버지학》 개론: 패륜의 윤리- 장벽을 허무는 장치로서의 ‘패드립’을 위하여
극우로 유명한 일본의 만화가 쿠메타 코지는 그의 만화 <안녕 절망선생> 157화에서 “실제로 이웃나라에는 사람을 매도하는 말이 일본어의 몇 배나 있기 때문에, 마치 인사하듯 매도하니까 일일이 신경을 쓰면 끝도 없다고 하네요.”라고 말했다. 그의 만화가 가진 극우적 성격을 비판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대부분의 한국어 화자는 쿠메타 코지의 이 발언만큼은 쉽게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설령 본인은 비속어를 쓰지 않는다고 하여도 한국어 대화 내에서 비속어의 사용은 매우 흔한 일이라는 것을 대부분의 한국어 화자가 공감할 것이다. 이러한 한국어 환경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비속어에서 금기시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상대방의 부모를 욕하는 것이다. 이러한 언사는 패륜적 언행 – ‘패드립’이라 불리며 온/오프라인 사회를 불문하고 금기시된다. 초등학생들이 다투다가 한쪽이 상대 부모 욕을 해서 싸움이 매우 격해진다거나, 악플이나 욕성 채팅을 쉽게 넘기는 인터넷 방송 스트리머들이 ‘패드립’을 높은 강도로 검열하는 것은 그리 낯선 상황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어에서 모욕적 표현과 비속어가 매우 발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청자의 부모를 욕하는 표현은 많이 쓰이지 않는다는 점은 이상하다.[1] 영어에서 가장 흔한 모욕 중 하나이며 강조를 위한 표현으로까지 쓰이는 말이 ‘mother fucker’이며 ‘son of bitch’ 등의 유사 수준의 어구가 있고, 불어에서도 거의 같은 의미인 ’fils de puit‘가 쓰인다. 서구권을 떠나 중국어에서도 ’肏你妈‘ 등의 표현이 흔하게 쓰인다는 것을 고려하면 패륜적 모욕의 부재는 유교 영향권 국가가 갖는 특이성도 아닌 듯하다.[2] 그러나 다시, 타 언어권의 패륜적 모욕을 보면 모두 청자의 모친을 욕되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이러한 비속어가 많이 사용되지 않는 한국어에서도, 모친을 욕보이는 표현들이 더 발달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현상에는 수많은 여성학적-언어학적 설명들이 가능할 테이지만, 본 고는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기보다는 현대 한국 사회를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 제언을 하고자 한다. 한국어는 패륜의 금기를 허물고, ’아버지‘를 욕보여야 한다.
전시 《Cryptopatriology: 환상종아버지학》(이하 《환상종아버지학》)은 한국(어)에 녹아 있는 ’아버지‘의 존재를 탐구하고자 “딸바보 아버지, 건국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 오늘날 우리의 삶과 사회에 뿌리 깊이 배어 있는 존경과 사랑, 동일시, 혹은 전복적 분노, 체념 등의 대상으로서의 ‘아버지’”를 소환한다.[3] ‘아버지’란 단어는 그 자체로 존칭어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부친은 존경의 대상이자 업신여김이 쉬이 허락되지 않는 존재이다. 한국은 특유의 ‘효’ 사상과 20세기 한반도를 관통한 두 번의 단절—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이 위태로운 한 국가-가정에서의 독특한 지위를 형성해 왔다. 이렇게 형성된 상징적 질서는 여전히 굳건하다. 이 굳건한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상상력을 개발해 내기 위해서는 낯선 전략이 필요하다. 《환상종아버지학》은 그 전략 중 하나로, 유머와 복잡한 감정에 기반한 ‘패드립’을 제시한다.
‘모에’로 부친을 축소시키기
강세윤은 자신의 기존 만화 작업에서부터, 부친의 권위와 지성, 힘을 희석시켜 왔다. 기존 작업 <탈증산도만화>에서는 증산도를 믿는 부친이 야기한 부조리함과 어리석음을 제시한다. 이 만화에서 주인공은 부친의 말에 따라 증산도를 믿고 그 신앙과 의례를 준수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모친의 병증 앞에서 무력했기에 어머니의 죽음을 막지 못한다. 이후 작 중에서 주인공의 부친은 증산도 교주의 죽음 이후에 점차 신앙을 잃어 갔다고 묘사된다. 주인공은 배우자의 죽음보다 교주의 죽음을 더 큰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부친을 보며 증산도에 대한 공격성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이 만화 속에서 주인공의 부친은 부조리한 신앙을 믿으며 자신의 딸에게도 강요하고, 무책임하며, 어리석다. 강세윤의 작업세계 안에서 부친은 신앙을 잃기 전과 후로 나뉘는데, 신앙을 잃기 전 부친은 강경하고 증산도 교리를 딸에게 전파하는 데에 매우 열성이었다. 그러나 신앙을 잃은 후부터는 매우 나약하고 미비한 존재로 묘사되기 시작한다.
그의 만화 안에서 부친을 지칭하는 데에 사용되는 용어 ‘앱얼쥐’는, 온라인 커뮤니티 상에서 ‘아버지’를 낮춰 부르기 위해 만들어진 파생어이다. 그러나 강세윤의 만화 안에서 ‘앱얼쥐’는 단순히 ‘아버지’의 우스꽝스러운 음차 표현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명사를 어원 단위에서부터 전복시키는 역할을 한다. ‘아버지’는 ‘아비’에서 파생되어 변형된 꼴이기에 접미어 ‘-지’는 큰 의미를 지니지 않지만, 그의 만화에서 사용되는 ‘얼쥐’라는 (고유)명사는 오히려 강아지나 망아지 따위에 쓰이는, 동물의 새끼를 부를 때 사용하는 접미어인 ‘-아지’를 활용하는 듯하다. 이에 맞춰 ‘얼쥐’는 새끼 동물처럼 주인공을 핥고, 낑낑거리며 운다.
이러한 맥락을 증명하듯이 《환상종아버지학》에 설치된 영상작업 <앱얼쥐스 2019>에서 ‘얼쥐’는 토끼의 형상이었다가, 얼굴만 토끼인 형상이 되기도 하고, 벌레의 꼴을 취하기도 한다.
나아가 모노톤의 드로잉으로 그려진 <아빠설정>에서는 다양한 모습의 부친이 그려진다. 다양한 분위기, 다양한 양식으로 묘사되는 부친의 형상 드로잉에 공통점이 있다면, 이들이 모두 일본 만화에 등장하는 캐릭터처럼 데포르메되어 그려진다는 것이다. 무력화되기 전 부친은 만화 속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형태만 지닌 몰개성한 꼴로 그려지지만, 《환상종아버지학》에 와서는 기존보다 훨씬 구체적인 형태로, 그러나 그 어떤 권력도 행사할 수 없는 꼴로 재현된다. 과거의 형형한 청년 시절의 모습은 이미 옛것이 되어 무의미하며, 현재의 부친은 그림자로 가득 찬 방에서 눈만 과거 명랑만화 캐릭터 같은 형태를 한 채 숨죽여 있다. 일본 만화에서 대상을 일부러 귀엽게 만드는 방법인 ‘모에화’를 통해서, 기존 ‘아버지’의 무게와 형태를 작가가 스스로 좌우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수많은 부모를 공유하는 수많은 자식들
이재빈의 작업 <십 개의 구멍>은 다소 충격적인 이미지들—십자가꼴로 누운 시체와, 그 시체의 배를 가르는 장면, 그릇된 형태의 사마귀, 자기 꼬리와 알을 먹는 뱀 등 AI로 만들어 낸 여러 생명에 대한 이미지들—의 푸티지로 이루어져 있다. 구멍과 유사한 이미지들을 AI로 대거 만들고 이들을 이어 붙이는 메타포적 몽타주를 시도함으로써, ‘구멍으로 함몰되는 세계’를 만들고자 한다고 이재빈은 말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 영상을 구성하는 거의 모든 푸티지가 생성형 AI를 활용하여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이재빈은 다른 설치 작업에서도 AI를 활용하여 생성한 형상들을 적극적으로 전시한다. 가장 흔히 사용되는 이미지 생성 AI 모델인 Stable Diffusion부터 거의 모든 생성형 AI는 무작위의 노이즈를, 축적된 데이터와 유사한 형태로 디노이즈함으로써 구체적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이 모델들이 학습한 것은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에서 수집한 수많은 이미지이며, 이 모델들에서 DNA라고 부를 수 있는 핵심적 요소들만을 추출하고 저장하고 있다가, 자연어로 된 요청이 오면 그 요청을 이미지 DNA에 맞춰 다시 그려나가는 것이다.
만약 개별 이미지에서 핵심 요소를 추출했다는 사실을, 이미지에서 DNA를 추출한 것이라고 표현하는 레토릭이 유효하다면, AI의 이미지는 전세계에 부모를 두고 만들어지는 전세계의 자식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랭보의 시구를 빌려서 말을 만든다면, AI 이미지는 ‘개새끼들의 한 배에서 나온 개새끼들’이 될 것이다. 무수한 부모가 하나의 수정으로 낳아버리는 무수한 자식들의 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구체적인 ‘부’도 ‘모’도 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상상력 자체만으로도 한국의 ‘아버지’라는 상징을 전복시키는 고도로 발달된 기술적technical 패륜일 것이다. 이 다중 부모를 공유하는 다중 자식들의 세계에서는 번식과 존속만이 중요하며, 기존의 이미지 질서들은 경시된다.
따라서, 이들의 세계에서는 기존 질서에서는 배제되었던 부조리한 이미지들이 대거 등장하며, 이들이 다시 부모이자 자식이 된다. 이재빈은 내용과 형식 모두를 전복하는 일종의 방법론적 ‘패륜’을 시도하고, 이를 통해 수많은 이미지들을 낳은 무수한 이미지들을 만들어 낸다.
설화적 효도의 그로테스크
송유경은 ‘아버지’의 상징을 무력화시킬 전략을 설화의 부조리함에서 탐색한다. 영상 <동자삼과 방화증>에서는 서양의 부친살해 설화와 대비되는, 부모를 위해 아들을 삶아 죽이는 이야기인 동자승 설화에 주목한다. 자식을 달여 건강을 회복하려는 아버지 설화는 인간의 형상을 닮은 인삼만큼이나 기괴하다. 영상에서는 이 설화에 더해, 대를 잇기 위해서 불을 지켜야 하는 며느리 이야기, 처녀로 변한 인삼 이야기가 서로 얽혀 진행된다.
과거 설화, 현대 화자의 이야기, 오래된 건물과 현대적 공간 속을 유영하는 이미지는, 한반도 사회의 가부장적 구조에 의해 분열을 겪게 되는 퀴어적 상황을 은유한다. 인간과 삼 사이, 자식과 약 사이, 가족과 타자 사이 속에서 혼란을 겪는 화자는 이 모든 상황이 끝나 있을 미래의 ‘다시 태어났을 때’를 희망한다.
송유경이 바라는 ‘때’는 아마, a와 b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과도기적 상황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수호신’이 될 수 있는, 타인의 역사와 속성을 이해하게 되어 불필요한 구분이 사라지는 세계인 듯하다. 전시에 설치된 또 다른 영상작업 <수호신이 사라진 세계>에서는 “소년이자 소녀이자 남자이자 여자인” 존재가 등장한다. a와 b 사이가 아닌, 동시에 a이자 b일 수 있는 존재의 힘은 강력하다. 이 주체는 권력의 주체이자 대상이 될 수 있고, 아버지이자 딸일 수 있다. 서로 각기 다른 곳에 위치한 존재들의 속성을 모두 공유함으로써 기존 질서를 붕괴시킬 전략을 소구한다. 동자삼이 아버지가 될 수 있는 세계에서는, 그로테스크한 ‘효도’를 요구하는 세계에서는, ‘나’가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나’가 되는 변혁적 쿠데타, ‘패륜’이 필요하다
가느다란 다리와 간신히 버티는 손
《환상종아버지학》에서, 차혜림에게 있어 ‘아버지’는 노쇠한다. 얇은 나무 지지대와 흰 손처럼 보이는 파이프 따위로 이루어진 설치 작업 <동년배(백관형)>는 허물어져 가는 자기 하나를 중심에 둔 채 가냘프게 서 있다. 이 구조물이 주는 황량한 느낌은 전시가 진행된 우석 갤러리의 분위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가 있다. 천장 파이프의 종횡구조와 유사한 형태로 바닥에서부터 서 있는 본 구조물은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것마냥 얌전히 서 있는 듯하다. 전시서문에 따르면, 이러한 형상은 차혜림이 미술을 하면서 깨달은 스스로의 ‘아저씨스러움’이 반영된 결과이다. 그 아저씨스러움은 목재와 흙의 투박함일 수도 있고, 나무로 된 세 발과 쇠파이프로 된 한 발처럼 짝이 맞지 않는 부조화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중 가장 핵심적인 ‘아저씨스러움’은 아마도, 얇고 가느다래서 쉽게 잘릴 듯한 느낌일 것이다. 초면에 ‘아저씨’라고 지칭되는 대부분의 존재는 유쾌하지 못하다. 배회하며, 화를 내고, 취해 있거나, 불쾌한 냄새가 난다. 그러나 차혜림은 이러한 아저씨스러움 속에서 도태되어 가는 이들의 존재론적 불안을 감지해 낸다.
흥미로운 것은, 유쾌하지 못한 ‘아저씨’는 때로는 내 ‘아버지’이고, 설령 내 ‘아버지’는 멀쩡하더라도, 남들이 보면 위태롭고 기분 나쁜 ‘아저씨’라는 점이다. 뻣뻣한 그들을 무력화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들이 얇고, 가느다라며, 늙어 망가지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는 것이다.
그의 또 다른 설치 작업 동년배는 작가에 의해 재구성된 근대기 유물을 겨우 버티고 있는 손 형태의 도자기가 있다. 군데군데 갈라지고, 손목도 없이 목판을 지탱하는 이 설치 작업은 역사에 짓눌린 세대를 나약한 존재로 바라봄으로써, 그 자체로 나약한 존재로 치환하는 시도를 한다. 이 손을 발견한 후에, 밑을 보면 깨지고 금 간 도자기 배 등이 켜켜이 쌓여 있다. 깨진 조각들은 실수로 밟거나 차고 넘어갈지도 모른다. 완고하고 강건한 대상을, 얇고 나약한 존재로 바라보는 것 그 자체로 사람들은 그 존재를 완전히 다른 위상으로 대우할 수 있다.
《환상종아버지학》에서는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패륜을 한다. 이는 단순히 저급한 조롱이나 실존 인물에 대한 폭력/모욕이 아닌, 기존 질서에 대한 미학적 전복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들은 공고히 자리 잡은 ‘아버지’의 이미지를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때로는 그 위엄을 축소시키고, 때로는 이질적 요소와 교차시키며, 때로는 그 권위를 희석시킨다. 심지어 연민의 대상으로 전락시킴으로써 그 절대성을 무력화하기도 한다. 이러한 접근은 단순한 반항을 넘어선다. 이는 가부장제와 권위주의적 구조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존재 기반을 탐색하는 작업이다. 《환상종아버지학》의 세계에서는 딸이 가부장에게 명령하고, 자식들이 부모를 낳으며, 그들에게 새로운 질서를 제시한다. 어떤 자식들은 엉망진창이고 패륜적인 이 새로운 질서 속에서만 그들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터이다. ‘환상종아버지학’은 그런 자식들과 아버지들을 예비하는 이론이 될 것이다.
* 이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 지원 특별 기고로 게재되었습니다.
[1] 젊은 세대들 속에서는 ‘앰창’이나 ‘느금마’, ‘느개비’ 등의 “패드립”이 조금 더 쓰이기는 하나, 이 또한 전세대에서 통용되고 이해되는 욕이라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2] 물론 다양한 한국어 욕이 어원적으로 패륜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나, 앞선 예시들과 달리 현대 한국어 형태에서는 대부분의 비속어들이 그 패륜적 어원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화하여 어원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보기는 어렵다.
[3] 《Cryptopatriology: 환상종아버지학》 전시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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