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박탈당한 정원들: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의 픽처레스크 열망에 대해

유미주
2024.10.01

안일하고 느슨하게 생명을 정의하기

  생명을 무엇으로 정의하느냐의 문제는 태고의 철학에서부터 현대의 생물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공간에서 논의되어 온 사안이지만, 본 고에서는 생명을 ‘태어나고 죽는 것’으로 부르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안일한 정의는 ‘태어남’의 의미와 ‘죽음’의 의미를 되묻게 하기에 다시금 추가적인 질문들을 낳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태어남’과 ‘죽음’의 의미를 일종의 공리로 대우한다면, 이 정의는 그 안일함만큼 더 다양한 대상들을 포섭할 수 있게 된다. 예컨대, 사람이나 사자 같은 동물의 생사는 물론이거니와, 배롱나무나 파래 같은 식물들, 세균 등의 미생물을 생명의 정의에 포함할 수 있다. 나아가, 칼이나 가방 같은 인공물에서부터 바다나 생태계까지도 은유를 통해 생명의 범주에 포섭시킬 수 있다. 칼의 탄생은 그것이 만들어진 순간일 것이며, 칼의 죽음은 날의 이가 나가고 녹이 슬어 칼로써 기능할 수 없어진 상태를 의미하게 될 것이다. 바다나 생태계 같은, 하나의 ‘계’의 탄생은 그 계가 해당 계로 인식될 수 있는 요건을 충족하였을 때로 설정할 수 있고, 그것의 죽음은 그 조건을 상실하였을 때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다소 인간중심적일 수 있으나, 더 많은 객체들을 생명의 범주로 포함할 수 있게 만든다. 안일한 정의는 딱 그 안일함만큼 너그러워질 것이다.

  생명을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객체’로 정의한다는 것은 개별 생명체를 일련의 과정으로 여기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탄생과 죽음을 포함하여 그 생명체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발생하는 사건과 의례 등의 과정을 겪는다는 것이 상식에 부합함을 고려할 때, 이러한 정의를 수용하는 것은 큰 무리가 없을 터이다. 생명을 과정으로 대우함으로써 획득 가능한 이점은, 모든 개별 ‘생명체’라는 과정에서, ‘시간’의 존재를 전제하게 된다는 것이다. 과정은 시간의 존재를 필연적으로 요구하기에 이는 자연스럽다. 칸트의 초월론을 구태여 언급하지 않더라도, 모든 생명이 각자에게 고유한 시간의 흐름을 부여받음은 매우 자명하다. 나아가, 이 전제는 생명의 외연을 무기물 행위자에게까지 확장하더라도 유효하다. ‘지구의 나이는 46억 살이다’ 따위의 흔한 수사적 표현이 이를 방증한다. 모든 생명은 일종의 과정이며, 그 본질은 시간에 매여 있다.

  따라서, 미술(관)이, 혹은 전시가, 생명체와 인접한 것을 포섭하고 드러낼 때에는 그 대상이 어떤 과정 즉, 어떤 시간에 속하여 있는 것인지 보여주어야 한다. 시간을 박탈당한 생명은 박제이거나, 아무리 운이 좋아도 하나의 ‘경관 파노라마’-픽처레스크picturesque로밖에 기능하지 못하게 되는 탓이다.[1] 애석하게도, 국립현대미술관의 조경 전시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이하 《정영선전》)는 정확히 이러한 오류를 범해버리고 만다. 혹여, 《정영선전》은 ‘조경’ 전시가 아닌 ‘조경가’ 전시이기에 괜찮다는 레토릭을 상정할 수도 있겠으나 이는 상정 가능한 가장 비참한 변명이 될 것이므로 이에 대한 언급은 본 고에서 하지 않을 것이다.

장소를 공간에 이식하는 방법들: 건축과 조경의 차이

  《정영선전》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한 첫 조경 전시로, 대한민국에 전문 영역으로써의 ‘조경’을 처음 만들어 나간 조경가 정영선의 “대학원생 시절의 작업부터 현재진행형인 프로젝트까지 정영선의 조경활동을 총망라”하여 일반 시민에게 선보이는 전시이다.[2] 이러한 프로젝트는 동시대 서울에서 유행하고 있는 건축 전시의 트렌드를 따라감과 동시에 인류세 시대의 주요 이슈인 생태 문제를 인간 측에서 해결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시도일 것이다. 전시 브로셔에 따르면 “정영선에게 조경은 미생물부터 우주까지 생동하는 모든 것을 재료 삼는 종합과학예술”이며, 정영선은 “생물다양성을 보전하기 위한 노력”을 한평생 해온 조경가이다.(3p.) 미생물과 우주를 “생동하는 모든 것”이라 언술하였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 전시가 인식하는 생명은 본 고의 초반에서 안일하게 정의한 생명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또, 정영선은 한국에서 미적/생태적 관점에서 가장 탁월한 정원을 만들어 온, 그리고 만들고 있는 조경가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정영선이 참여한 아모레 퍼시픽의 원료식물원이나 호암 미술관의 희원 등이 이룬 성취에 대해서는 <환경과조경>에서 기발행된 글들을 둘러보기만 하여도 쉬이 알 수 있다. 따라서 문제는 정영선이나 그의 정원이 아니고, 《정영선전》이다. 이 전시 공간의 이미지에는 ‘시간’이 없고, ‘시간’이 없기에 당연히 ‘생태’와 ‘정원’도 없다.

《정영선전》 전경 (이미지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유튜브)

 
  《정영선전》이 실패한 전시임이 자명한 이유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공간이 보여주는 것이 ‘정원’이 아니라, ‘이미지’인 탓이다. 물론, 이 말에는 두 가지 어폐가 있다. 《정영선전》은 실제로 전시마당과 종친부마당에 전시 기간 동안 프로젝트 정원을 설치하여 ‘정원’을 보여주고 있으며, 설령 그렇지 못하였다고 하여도, 정원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은 비판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점이다. 그 누구도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진행된 건축 전시 《미래긍정: 노먼 포스터, 포스터 + 파트너스》(이하 《노먼 포스터전》)를 보러 갈 때, 전시 공간 안에 실제 애플 사옥이 있기를 기대하지는 않을 것이며, 그것을 전시공간 내에 들이지 못했다는 이유로 비판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인 탓이다. 이 불가능을 대신하여 서울시립미술관은 애플 사옥을 비롯한 노먼 포스터의 대표적 건축을 전시하기 위해 각종 모델과 영상, 드로잉 등을 전시 공간에 채워 넣었다. 해당 전시의 관객들은 사진과 유닛 모델, 드로잉 등 복합적 자료를 통해서 특정 건축들을 구성하는 핵심 컨셉과 전체적인 형상, 그리고 건축물의 맥락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었다. 이런저런 비판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이나 서울시립미술관의 《노먼 포스터전》이 제한된 예산에서 무료로 진행되어야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건축 전문 전시로도, 대중 지향 전시로도 충분히 성공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노먼 포스터전》이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전시가 설령 애플 사옥을 직접 들여오지 못했더라도 애플 사옥의 핵심 아이디어와, 해당 디자인의 필연성 등을 모델링과 이미지 등을 통해 충분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전시된 모형을 통해서 세계 굴지의 대기업 ‘애플’의 폐쇄성과 디자인 컨셉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애플 사옥, (사진 출처: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

 
  물론, 빌딩을 직접 방문하는 것이 개별 건축을 경험하는 가장 좋은 방법임은 자명하지만, 이를 어렵게 만드는 여러 물리적/제도적 한계가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노먼 포스터전》은 애플 사옥이 현재의 형태를 갖게 된 이유를 충분히 설명한다. 고리형 구조에서 각 셀이 모두 분리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해당 고리형 구조를 관통하는 통로가 없는 대신 안에 정원을 설치함으로써 모든 부서 간의 연결성보다는 각 셀 단위로 나뉜 팀의 독립 작업 및 인근 유관 부서와의 협업을 중시함을 알리고, 방대한 크기의 정원을 통해 애플의 친환경 지향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전시 디자인을 통해 전시가 보여줘야 하는 것, 개별 건축의 컨셉과 속성을 충분히 보여주는 셈이다.

구태의연한 픽쳐레스크: 조경을 회화로 대우하기

  그러나 《정영선전》은, 정원이 다양한 생명체인 식물이 모인 곳임에도 불구하고, 한 생태계-군락으로써의 속성도 보여주지 못하고 해당 정원이 포함하고 있는 개별 생명들의 특징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이 전시가 드러내는 것은 회화화된 정원, 시간을 박탈당하고 그저 ‘예쁘게’ 고정된 이미지로만 기능하는, 박제되어 버린 정원뿐이다.

  정원은 계절의 변화 –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해마다 계속 변화를 반복하는, 그러나 조금씩 다르게 변화한다는 데에서 일반적인 건축과 차이를 갖는다. 당연히, 건축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화할 테지만, 그 속도는 식물의 군집으로 이루어진 정원보다는 매우 느리며, 특정한 패턴을 갖고 반복한다기보다는 일방향적으로 낡아갈 것이다. 매일 조금씩 변화하고, 계절의 변화에 의해 완전히 모습을 변화하였다가, 해가 바뀌면서 다시 익숙한, 그러나 예년과 조금씩은 다른 형상을 보여주는 것이 인공(人工)과 자연(自然)의 경계에 있는 정원의 본질 중 하나이다. 따라서 정원을 보여줄 때에는 해당 공간이 어떤 구체적 장소에 위치하여 어떻게 시간의 흐름에 반응하며 변화하는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렇지 못하고 특정한 순간의 이미지만 보여준다면, 그것은 정원 전시가 아닌, 구태의연해진 픽처레스크를 재연 사진전이 될 뿐이다.

  《정영선전》을 채운 이미지들은 보통, 다음 세 가지 형식 중 하나를 갖는다. 1) 전경 사진, 2) 식재계획 등의 설계 도면, 3) 핸드 스케치가 그것들이고, 대부분의 전시물은 이 세 가지 요소를 조합하거나 병치하는 등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경춘선 숲길> 전경 사진
<경춘선 숲길> 식재 계획
<두내원> 스케치

 
  그러나 이 요소들은 개별 정원을 설명하고 드러낸다기보다는, 그저 독립적인 이미지들로 기능할 뿐이었다. 전경 사진은 조경 자체를 보여주기보다는 보기 좋은 ‘풍경’ 사진들을 모아 놓은 것에 더 가까웠으며, 대부분의 도면들은 읽히기보다는 그곳에 ‘존재’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장식으로 기능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작은 글씨, 빛을 밝게 반사하는 유리창 탓에 도면을 읽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에, 도면의 기능은 ‘이런 것이 존재했었다’ 정도를 예증하는 수준에 멈춰 있었다. 여러 매의 도면이 통째로 유리창 안에 들어가 있는 경우, 그 두터운 매수는 그저 정영선의 지적 노고를 상상하게만 할 뿐, 그 어떤 실질적인 기능을 하지 않았다. 스케치의 경우 다소 미적인 만족감을 줄 수 있을지 모르나, 도면과 유사한 이유로 독해해는 것이 매우 어려운 전시물이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정영선전》의 전시 관람을 불편하게 만든 것은, 조경에서 시간성을 배제해 버린 전시품 선택과 거기에서 드러나는 픽처레스크를 향한 구시대적 열망, 즉 큐레이토리얼이었다. 한 장의 화면에서 시간의 변화를 드러내려 한 것은 테오도르 제리코의 말 그림, 에티엔 쥘 마레의 크로노포토그라피와 그래픽 디자인적 시도를 넘어서 이제 하나의 어법이 된 수준이지만 시간의 시각화는 《정영선전》에서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시간 정보의 시각화가 단순히 미술사의 영역에 속하지 않고, 정보의 디자인 영역에서도 아주 기본적인 요소임을 고려할 때, 이는 매우 의뭉스럽다. 정보 디자인의 기초를 확립한 통계학자이자 그래픽 디자이너인 에드워드 터프티(Edward Tufte)의 저서 『The Visual Display of Quantitative Information Beautiful Evidence』(1983)에서는 수십 년 전 그래픽 디자인을 통해 이것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아래 이미지들은 로스앤젤레스 6개 카운티에서의 시간에 따른 공기 오염도 변화, 월 변화에 따른 풍뎅이의 변태 과정을 시각화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간의 흐름에 따른 대상의 변화를 기술하는 시각적 방법은 미술사와 디자인 이론을 거쳐 체계적으로 정립되어 왔으며, 조경계도 이를 충실히 수용해 왔다.

Los Angeles Times, July 22, 1979; based on work of Gregory J. McRae, 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
L. Hugh Newman, Man and Insects (London, 1965)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를 반복하는 정원의 특성상, 조경에서는 시공간 그래픽time-space graphic이 식재 계획 내에 수종 팔레트plant palelltes라는 이름으로 왕왕 활용되어 왔다. 식재계획과 수종팔레트는 계절별 정원의 색상 변화와, 정원 내 각 식물들의 월별 색상 변화를 드러내는 그래픽이며, 누구나 한 번만 보면 도면이 의미하는 바를 직관할 수 있다.

Ecology. New city park in St. Petersburg by West 8 + Studio 44
제1회 LH 젊은 조경가 조경설계공모 최우수 선정작에서 발췌, 조경사무소 사람과나무

 
  조경계 내에서 이렇게 독해하기 쉽게 발달한 시각 언어가 존재하지만, 《정영선전》에서는 이러한 양식의 식재 계획과 수종 팔레트는 비치되지 않았다. 이러한 디자인 그래픽은 조경 어법에 익숙치 않은 관람객도 개별 정원의 계절 변화에 대해 능동적으로 상상하게 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보는 전시 공간 내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개별 공간의 계절 변화에 대해 알 수 있는 단서가 전무한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모헌> 정원이나 <조안리 정원>의 경우, 사진을 통해 해당 정원의 계절별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정영선전》에 비치된 정원의 계절별 사진과, 식재계획 컬러 인포그래픽은 그 목적이 아예 상이하기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모헌> 전경사진
<조안리 정원> 전경 사진

 
  <모헌>과 <조안리 정원>의 사진 전시물 등에서는 단풍과 설경을 활용하여 조경의 계절성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실제로 이 사진들은 개별 정원의 시간성을 전혀 대변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사진들이 같은 정원 내에서 촬영되었다고 하더라도, 전혀 다른 장소를 전혀 다른 구도로 촬영하고 있는 탓이다. 예컨대, <모헌> 사진은 정원의 조감과 정면 이미지를 제시하는데, 이 사실 관람자가 이 두 장의 사진을 하나의 공간으로 머릿속에서 상정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상상력이 풍부한 관객이라면 두 사진을 가지고 하나의 정원을 구성해 낼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 구조는 실제의 정원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조안리 정원>의 경우도 같은 문제를 공유한다. 조금 더 강하게 말하면, 아무 풍경 사진이나 정원 사진을 가져다 놓고 옆에 같이 전시하여도 관람객은 그 사진이 제시하는 정보가 해당 정원과 일치하는 것인지 아닌지 전혀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조안리 정원> 등이 친숙한 관객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저 옆에 <희원>이나 심지어는 다른 조경가의 정원의 일부를 촬영한 사진을 가져다 놓는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의문스럽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사진들은 하나의 생태계, 생명들의 군집이자 터전으로서의 정원을 전시에서 드러내는 데에 실패하고 있다. 만에 하나 정영선이 상술한 그래픽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전시를 준비하는 측에서 일관된 사진 촬영 등으로 이를 갈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영선전》은 조경 공간을 하나의 생태계로 존중하지 못한 채, 분리되고 절단된 시각 이미지로 분절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프랑스의 지리학자 어거스틴 베르크가, 풍경landscape라는 개념이 근대 유럽 사회가 인간을 자연과 스스로 탈각detach하면서 발생한 개념이라고 말한 것과 이론적으로도, 전시 수행 차원에서도 궤를 같이한다.[3] 이 분절되고 분리된 정원에 ‘숨’을 위한 시간은 없다.

  상술한 논의를 수용한다면, 《정영선전》이 조경 전시로써 완만히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자명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자명한 실패를 조소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실패의 근원을 탐색하는 것이다. 《정영선전》이 조경 전시로 성공하지 못한 것은 조경에 대한 큐레이토리얼의 낮은 이해와, 픽처레스크적 스펙타클에 대한 낡은 욕망 때문이다.

  사실, 미술계 내에서 사회 문제들을 스펙타클로 소비하는 데에는 많은 비판적 성찰이 있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립현대미술관은 조경을 스펙타클로 소비하는 데에 대한, 생태미학에 기반한 비판적 감수성을 아직은 기르지 못한 듯하다. 사실 조경을 단순히 인간중심주의적인 픽처레스크로 대우하는 것에 대한 비판은 이미 2-30년 전부터 존재해 왔다. 이는 현대 조경 미학의 가장 중요한 비판 중 하나이며, 서구적 ‘정원’이라고 하는, 그 근원에서부터 자연을 지배하여 전시하려는 욕망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기도 했다. 대표적 환경미학자인 아놀드 벌리언트는 자연과 인간의 분리 문제를 언급하며, 픽처레스크 스펙타클로 귀결되어 버린 경관의 윤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파노라마적인 경관에서 벗어나 ‘참여적인 경관participatory landscape’이라는 대안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Yet with landscape, too, we can identify a range of alternatives, from the panoramic landscape that easily turns an environment into a visual object, to the participatory landscape that incorporates the appreciator perceptually and relinquishes any sense of separateness. As with environment, the issue of separation from or continuity with the perceiver remains problematic.”[4]

  그러나 《정영선전》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러한 생태미학적 논의에 관심이 없다는 양, 정원을 일련의 파노라마로 소비하는 데에 급급한 듯하다. 이러한 전시 수행은 이론적인 비판을 차치하고서도, 자가당착적이다. 《정영선전》의 브로셔는 “정영선에게 조경은 미생물부터 우주까지 생동하는 모든 것을 재료 삼는 종합과학예술이다. (…) 정영선은 50여 년의 조경 인생 동안 우리 땅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고유 자생종의 생물다양성을 보전하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 (…) “조경가는 연결사”라는 그의 말처럼 정영선의 작업은 사람과 경관과의 관계, 건축과 도시, 나아가 대지의 관계를 해석하고 디자인해 온 것이다.” 말하지만, 이 전시는 ‘생동하는 모든 것’의 호흡을 존중하지도, “조경가는 연결사”라는 정영선의 말에 무게를 싣지도 않는다.

  물론, 국립현대미술관은 전시마당과 종친부마당에 프로젝트성 정원을 구성함으로써 관람객이 정영선의 정원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놓는 식의 노력은 하였다. 그러나, 전시마당의 정원은 기실 ‘경험’을 위한 것이 아니라 ‘관람’을 위한 것에 가까워서 대부분의 전시 기간 동안은 출입구가 잠겨 있어 쉬이 갈 수 없었다.[5] 그리고 설령 전시정원에 대한 접근성이 훨씬 확충된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본 전시를 2회 이상 여러 계절에 걸쳐 재방문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러한 전시경험조차 단발적인 파노라마로 끝나리라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정영선전》은 조금 더 노력했어야 했다. 도면을 통해 관람객에게 정원의 이미지에 시계열 그래픽을 제공한다거나, 아카이브성 사진을 계절별로 확보하여 최대한 다양한 시간대에 대한 정원 정보를 제공한다거나 하는 등의 노력을 했었어야 했다. 그러나 본 전시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이 정원을 하나의 생명체로 대우하는, 그러한 태도와 노력은 사실 찾아보기 매우 어려웠다. 본 전시에 대한 이 박한 평가는 본 고의 독선적 판단은 아닐 것이다. 본 전시 개관과 매우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정영선 다큐멘터리 영화 <땅에 쓰는 시>에서는 다음과 같은 장면들이 있다.

<땅에 쓰는 시>(2024), 정다운, 일부 장면.

 
  정영선은 식물과 곤충, 동물의 총체로 이루어지는 조경은 그 본질이 변화에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그렇기에 매 순간 변화하는 정원의 형상에 조응하고, 대응하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며 정원에서 일한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정영선전》 큐레이토리얼의 조경에 대한 몰이해는, 정영선의 작품세계가 찬란한 만큼, 딱 그만큼 아쉬움을 남긴다.

  아마도, 미술관 내 전시공간이 아닌, 외부에 흙을 파고 나무를 심어 정원을 만드는 조경계는 《정영선전》에 대해 큰 불만이 없을 것이다. 그들의 영역은 미술관 안이 아니라, 미술관 밖이고, 《정영선전》의 진행 그 자체를 하나의 성과처럼 여길지도 모른다. 정영선은 정말로, 너무나 중요하고도 거대한 조경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령 조경계가 이러한 전시를 반길지 몰라도, 미술계는 본 전시의 경솔함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조경가가 전시를 만들지 않고, 큐레이터가 나무를 심지 않는다. 정원에 대해 비평하는 것은 조경의 일이고 전시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미술의 일이다. 당신은 당신의 일을,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는 것이 윤리이다.

  * 이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 지원 특별 기고로 게재되었습니다.


[1] 물론, 생명을 매우 느슨하게 정의하였기에, 박제도 하나의 생명으로 대우할 수 있으며, 나아가 한 동물이 박제가 되고, 다시 박제가 새로운 죽음을 맞는, 계속 변화하는 무제한적 연명을 상상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2]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브로셔, 국립현대미술관, 3p.

[3] Berque, Augustin. “BEYOND THE MODERN LANDSCAPE.” AA Files, no. 25 (1993). 33p.

[4] Berleant, Arnold. 1997. Living in the Landscape : Toward an Aesthetics of Environment. 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30p.

[5] 전시 운영 시작일 후부터, 8월 20일까지 나는 총 네 번 본 전시에 방문하였으나 그 중 세 번은 문이 잠겨 정원을 유리창 너머로밖에 볼 수 없었다. 물론 이는 관리 문제와도 긴밀히 얽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댓글

댓글 작성하기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