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 가위바위보

엄제현
2024.08.11

  “이제 저 좀 죽여달라”고 사정하던 99세의 노인이 어느 날 새벽 수액줄에 목을 감아 자사自死했다. 와락 다가온 사건이었다. 마치 나 홀로 양 손으로 가위바위보를 하듯, 다음처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명이라는 추상은 절대적으로 옹호되어야 할 영역인가? 죽음을 삶의 일부로 통합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대상으로 간주할 수 있나? 질병과 고통을 이유로 안락사를 택하는 것은 목욕물과 함께 아이를 버리는 격으로 생명을 제거해버리는 우를 범하는 걸까? 질병과 고통마저 남김없이 살아내는, 생의 남은 한 방울까지 짜먹는 일은 삶의 풍부함을 누리는 행위인가? 안락사는 운명의 자기결정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정해진 운명을 앞당기는 행위일 뿐인가? 안락사의 요청은 자기 삶으로부터의 무책임한 도피인가? 아니면 자기책임의 윤리 안에서 가능한 시나리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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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기를 먼저 다루자. 위의 그래프를 보고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경제적으로 이염된 시각에선 저 위의 피부양인구가 끔찍한 적체물처럼 보인다. 작금 청년들 눈에 부머세대는 이후 국민연금과 건보재정을 파탄낼 골칫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한정된 자원과 미래를 대출받듯 끌어당겨 모두 해처먹은 뒤 이후 세대를 평화롭게 학살하는 야만을 표상한다. 고성장기의 단꿀을 빨아먹고, 엉성한 시스템의 장내 영양소를 마구 편취하고, 무능하면서도 이 세계에 먼저 입장했다는 이유로 자산을 독점적으로 쓸어담고, 직장 내에선 부하직원의 능력을 갈아마시면서도 자신들을 위한 기상천외한 의전과 조직문화를 만들어 젊은 세대를 괴롭히는, 한국을 망가뜨린 주범. 심지어 그들은 잘 죽지도 않을 것이다.

통계청

  통계청의 추계에 따르면, (최근 몇 년간 거듭 빗나간)중위추계임에도 불구하고 2072년에 노인인구는 47.7%로, 지금 청년 세대는 이후 명백하게 사회를 좀먹는 인간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나와 비슷한 세대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듯하다. “당신은 사회를 위해 안락사를 택할 수 있나요?” 실제 고대에는 오래 사는 것을 불명예로 여기고, 노인이 자살하는 것을 명예로운 행동으로 간주하는 문화를 구성해서 입을 줄이는 효과를 누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런 관점은 개인의 생명을 사회의 명운보다 덜 중요한 가치로 취급할 수 있느냐는 논쟁을 다시금 거쳐야 하며, 경제적 관점에서 쓸모 있는 인간과 쓸모 없는 인간을 식별함으로써 지난 세기의 프레임을 다시금 꺼내드는 과오를 반복하고 만다. 그러므로 배면엔 그러한 의도가 실제로 깔려있다 하더라도, 국가재정 문제에 기인한 안락사의 논의는 절대적으로 금지되어야 한다.(또한 모든 안락사에 대해 나치즘이라는 혐의를 씌우면서 논의를 저급하게 만드는 일은 없어야 하며, 강제안락사와 자발적안락사는 일단은 구분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관점으로 접근해야 할까? 안락사의 범주부터 이야기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안락사는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연명치료금지 2.소극적 안락사 3.의사조력자살(PAS) 4.적극적 안락사
  1은 치료적으로 회생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등 치료효과 없이 임종만 연장하는 환자들의 치료 중단을 허락한다. 2는 영양공급의 중단을 통해 생명을 단축하는 것으로 호흡중추가 기능하는 식물인간 등에게 시행할 수 있다. 3은 의사에게 받은 약물을 환자 스스로 복용하여 죽음에 이르는 것이고, 4는 의사가 직접적으로 약물을 주입하는 것을 뜻한다. 1과 2를 존엄사, 3과 4를 안락사로 다시금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자율성과 생명에 대한 사회적 기치 사이에서 준동하는 것은 3이라고 할 수 있고, 오늘 고민할 안락사 역시 3의 영역에 해당한다.

  오늘날 기계가 저 오랜 옛날부터 해온 해방이라는 약속을 곧이곧대로 믿는 인간은 거의 없다시피 한 것 같다. 실생활에서 노동을 위협하는 기계의 급진적 변화는 물론, 원내에서 기계는 인간을 죽음으로의 해방을 돕긴 커녕, 집요하리만치 삶에 정박시키는 일을 한다. 적지 않은 경우 원내사망 역시 허구적 시나리오인데, 내가 일하며 본 것만 해도 컨테이너 가건물에서 잔뜩 나뒹구는 술병과 함께 널부러져 있던 음독사체, 치매로 인해 행방불명되었다가 몇 주 뒤 하천변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노인, 2주에 한번 방문하는 이동목욕차 직원에 의해 발견된 노인, 며칠 간 연락이 닿지 않아 직접 찾아온 친척에 의해 발견된, 수포가 부풀어 오르는 시체 등이 있었고, 요양병원에서는 겉보기에 조금 나았지만 의료진의 콜을 제때 받아 오는 보호자는 생각보다 적어 결국 간호사를 마지막으로 대면하고 죽는 망자의 수가 압도적이었다. 가족과 친지의 배웅과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현대인에게 난이도 높은 미션이기에 PAS의 해방은 죽음의 획일화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삶을 회고하고 미뤄둔 문제를 정리한 후, 가족의 곁에서 따듯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라는 생각이 든다.(아울러 이는 고독사, 치매로 인한 자아상실,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기능부전형 질환 등 불안을 야기하는 노년의 상상적 위기를 위안한다)

  하지만 PAS를 사회적으로 허용하기에 앞서 공론장에서의 합의와 대화가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몇 가지 다룰 거리가 있다. 자살은 살인인가? 이 물음은 주어진 자기 생명에 대해 배타적 소유권이 있는지를 가리킨다. 인류가 살인의 금지라는 제1공리를 통해 공동체를 성립시키고 민주 사회를 설계했기 때문에 생명이라는 것은 무조건적으로 존중받아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고 있다. 생명의 보편적 등가성은 태내생명의 경우 조금 예외적인데, 한국 모자보건법은 24주 이내 태아에 관해서는 우생학적 낙태를 허용하고 있으며, 강간 등으로 인해 발생한, 원치 않는 생명의 경우 기독교적으로 채색되지 않은 세계관에서도 불온한 것으로 인지하고 낙태할 수 있는 범주로 놓는다. 또한 산모의 생명이 그가 태내에 보유한 생명보다 우선시되면서 차등을 형성한다. 그러나 일단 세상에 나와 빛을 본 이상, 그 대우에 있어 모든 생명은 평등하게 존엄하다. 나 자신조차 나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 게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생명은 내게 속하면서도 속하지 않는 모순을 형성한다.

  모순은 또 다른 모순에 의해 거듭모순이 된다. 정당방위, 전쟁, 사형제도의 경우 생명은 불가침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니 생명은 하나의 명제처럼 다루어야 할 것 같다. ‘만인이 평등하다’는 프랑스 선언이 실제로는 늘 침해되지만 비유명론적인 추상의 수준에서 하나의 선을 만들어내듯, 생명 역시도 ‘아무튼 불가침’으로 상정하는 것이 부작용이 덜한 선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 생명의 불가침이 곧 생명권과 직결될까? 오히려, 오늘날 그것은 한층 더 나아가 생명강요에 이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누구도 죽으라고 핍박받아선 안 되듯이, 살라고 핍박받아서도 안 되는 건 아닐까? 누군가에겐 삶이 희망이지만, 누군가에겐 죽음이 곧 희망 아닐까?

  그렇다 해도 PAS를 허용하기엔 환자의 자율성을 어디까지 신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잇따른다. 여기서 죽기는 존엄하게-죽기가 아니라 자율적으로-죽기의 문제가 된다. 조력자살이 임종기에 하나의 선택 가능한 옵션이 될 경우, 남겨질 가족의 경제적 곤궁을 과잉 의식해 실제로는 더 살고 싶지만 죽음을 택하는 노인이 있다고 하면 어떨까. 별도로, 죽음에 대한 양가감정을 완전히 표백하고 그의 조력자살 요청을 수긍할 수 있을까? 그는 죽고 싶다기 보단 이렇게 살기 싫다는 표현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제반의 이유들도 안락사의 이유로 긍정될 수 있을까? 자율성은 거짓 담화나 사인 등으로 얼마든 가장될 수 있기 때문에 자율적 책임을 지닌 개인 개념과 마찬가지로 불신의 여지를 제거하기 불가능하고, 질병과 고통에 의해 괴로워할수록 가중되는 판단력의 훼손은 그 참을 신용하기 어렵게 한다. 별개로 안락사가 어떤 연민에서 비롯되던 간에 그것은 살만한 생명과 죽는 게 나은 생명을 사회적으로 판가름하는 결과를 낳는다. 여기는 차라리 회색지대로 두는 것이 투명한 처사라는 인상까지 준다. 노인은 죽음에 근접했기 때문에 안락사가 허락되나? 그렇다면 정신이상자나 장애인은? 치매는? 루게릭은?

  안락사를 부정하는 쪽이 도덕을 독점하진 않는다. 반론 역시 동일한 선상에서 얼마든 가능하다는 점이 안락사 거부에 대한 윤리적 주장 일체를 무화시킨다. 루게릭은 수의근의 신경세포가 점차 사멸하면서 결과적으로는 호흡을 중지시킨다. 인간은 생명의 불가침성에 의해 숨골의 기능이 정지할 때까지 자신의 생명을 남김없이 핥아먹어야 하나? 비가역적 질환을 품고서도 노환에 의한 사망이라는 골대에 다다를 때까지 레이스를 멈추지 말아야 하나? ‘정상인’이라는 단일초점에 맞춰 제작된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불편감을, 투명인간 취급을 받아가면서도 이 악물고 견뎌야 하나? 치매로 인해 때때로 내가 나 자신이 아니라는 느낌에 시달리며 형언할 수 없는 자괴감을 느껴도? 안락사에 대한 규준이 야기하는 가치판단만큼, 안락사가 존재하지 않는 제도는 모든 생을 살도록 강제하면서 사적 비극에는 눈을 감기 때문에 역시 사회의 선험적 판단이다. 우리는 숨이 붙어 있어서 사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살게 되어 있기 때문에 산다.

  따라서 안락사의 포괄적 초점은 “죽음이 사회적으로 요청 가능한 권리로 성립될 수 있느냐”는 물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자유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보호받는 순수한 자기 관념이 아닌 이상 자유에 기초해 사회를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죽고 싶다는 개인의 감정과 느낌에 의해 안락사의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 불합리한 이유는, 그런 독단적이고 자의적인 경우를 허용할 때의 부작용도 무시 못할 뿐더러, 죽음이 필연적으로 정신문화를 구성하는 이상, 공동체가 납득할 수 있는 논리적 지평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문화라면 응당 의학의 범주에 한정될 수 없다. 안락사에 있어 의학적 판단은 정보 제공자의 위치로 한정하며 불필요한 책임을 면제시켜야 하고, 종교나 철학을 포괄하는 다양한 직군의 협업과 그들로부터 비롯되는 담론의 담금질을 거쳐야 한다. 질병-치료 담론의 도식은 그저 살리기-죽게 내버려두기-죽이기의 삭막한 옵션밖에 제공하지 않으니까.

  한동안 나는 신체에 대해서, 더 정확히는 의미를 생산하는 신체에 대해서 생각했었다. 요양병원 귀퉁이에 누워 있는 신체는 육체적으론 기능하지만, 그 육체를 통한 사회적 작용은 모두 상실한 상태로 관리되고 있었다. 활동은 물론이고 몸과 혀가 생산하는 의미와 발화 역시도 대화의 문턱에서 경청해야 할 의미를 생산할 수 없었고, 덩어리진 몸뚱이로 전락한 채 측정되고 돌보아졌다. 상징적 담화의 구조에서 퇴장한 신체를 무엇이라 정의내려야 할까? 때때로 그것은 동물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단지 계속될 뿐인 삶에 대한 거부감…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곧 우리도 안락사라는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을 마주할 것이라는. 집단의 생존이나 경제적 이유에서 비롯되는 안락사의 도입은 그간의 노력을 기만하는 응답이 된다. 나는 이런 사악한 힘의 귀환을 거부하고 싶다. 공동체가 별다른 고민 없이 상황에 떠밀려 죽음 장치를 활성화시킨다는 건 의심의 여지 없이 섬뜩하고 해괴한 볼거리일 것이다. 동일한 안락사라고 해도, 존엄의 가치를 물으며 사회 내에서 죽음을 권리로써 상상하며 제도를 요청하는 것과 구조적 압력에 의해 유입되는 것을 사도마조히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사이엔 부동의 골이 놓여 있다. 사회적 대화나 공론장 따위의 언어가 완전히 망가졌다 해도, 말을 건넨다는 행위를 멈출 수 없는 이유가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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