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늘 그래왔듯 무빙 이미지 작업에는 조각난 전자음들이 함께 재생된다. 나아가, 미술관은 이러한 음악들이 더 이상 시각 예술을 위한 배경음악이 아니라 여기며, 할당된 공간을 점거할 수 있는 또 다른 예술 형식으로 전시한다. 예술가들은 사운드를 전시장에서 우두커니 바라볼 수 있는 무형의 오브제로 출품한다. 알다시피, 이러한 전략은 이미 한 세기 전부터 예견되어 왔다. 다다(Dada)를 거쳐 플럭서스(Fluxus)까지, 미술과 음악은 모두 그 전통적 제도 공간들을 벗어나 다양한 가지로 뻗어 나갔다. 루이지 루솔로(Luigi Russolo)의 소음 기계와 존 케이지(John Cage)의 퍼포먼스는 적어도 음악을 콘서트홀에서 탈출시켰다는 공로를 가지며, ‘아방가르드’한 어느 공간에도 진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미술관이라는 거대한 제도의 시공간에 반동적이었던 그들은 미술관과 콘서트홀을 해체된 상태로 남겨놓기만 할 뿐이었다. 그들의 미술과 음악은 그들이 각각 속해있던 장르적 클리셰와 고유한 제도에서 탈출하여 경계 밖의 카오스에 잔존했다. 이후 미술의 경계를 해체하는 열병에 시달린 포스트모던한 미술관들은 ‘비정형’(formless)의 모든 방식들을 (전시될 수 있는) 제도적 작품으로 인정한다. 사운드 조각 혹은 사운드 아트로 명명된 일련의 현상들은 이 시기에 미술관에 온전히 입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네오 아방가르드를 관통하는 이 충동은 한순간에 급작스럽게 만족되지 않았다. 미술가가 소리를 만들고, 음악가가 조소를 하며, 엔지니어가 이미지를 생성했다. 클리셰를 벗어던진 형식들은 서로의 생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협조했다. 엔지니어와 미술가, 음악가의 협업은 태동기를 거쳐 이제는 미술관에 나타나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정교한 형식적 완성도를 보인다. (물론 이것은 포스트모던한 예술계가 통용하는 미학의 감상 태도를 수반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기존 미술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소리 혹은 음악을 사용하는 작품들이 두껍게 퇴적된 계보의 지층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것의 미적인 함의는 차치하고서라도, 위와 같은 작품들은 모더니즘 이후의 미술관들이 구축하려 노력했던 다원주의적 충동을 훌륭하게 실현한다. 미술과 테크놀로지, 음악과 퍼포먼스는 오랜 기간동안 결합하여 동시대 예술 형식의 클리셰(동시대적 예술 취향)를 이루었다. 음악은 미술의 배경 음악이 아니며, 미술은 음악의 뮤직비디오가 아니고, 테크놀로지는 작품의 근원적 매체이다. 방향이 어떻든, 이러한 작품들이 수집되는 동시대의 미술관은 자신의 특수한 정체성을 나름대로 단단하게 구축한 것이다.
2.
위와 같은 사건들은 해체와 중화(中和)의 징후이기도 하다. 이제는 전원이 켜진 믹서와 직접 연주되는 신디사이저가 미술관에 나타나고 있다. 음악과 시각 예술의 접목은 그리 짧지 않은 역사를 가지지만, 이제 미술관은 미술사와 어떠한 변증법적 연관을 가지지 않았던, (미술관) 바깥의 언더그라운드 음악 자체에 공간을 할당해 주고 있다. 미술관 바깥에서 활동하던 음악가들은 미술관에 초청받고 그 안에서 공연한다. 이전에, 미술관에서의 DJ 와 밴드 공연은 주로 전시의 오프닝 혹은 클로징 파티에 개최되었으며 이는 어디까지나 행사의 배경음악 혹은 축하 공연쯤으로 치부되었다. 이러한 공연은 전시의 일의적 당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샌가 음악가들이 미술관의 프로그램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문화적으로 독립되어 보이던 대중음악이 미술관의 프로그램이라는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사실 이러한 현상의 발생은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is)가 언급한바, 미술관이 전유하는 ‘변화의 특권’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전시의 공연과 연극 프로그램이 보여주는 가변적이고 휘발적인 시간성은 미술관의 문화적 정체성이 가변적이게 되었다는 증상이기도 하다. 미술관은 이제 매우 불안정한 아카이브와 더불어 변화의 특권에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컨벤션 홀로 보이기도 한다. 이 컨벤션 홀은 “참석의 경제”(히토 슈타이얼)에 충실하며 자신들이 취급하는 문화 현상들의 다양성을 화폐화하여 값을 매긴다.** 그러나 이러한 가속적 큐레이팅이 미술관의 전통적 벽을 허무는 장갑차일까? 이것은 오히려 쿠데타에 가깝다.
3.
언더그라운드 음악가들은 미술관에게 충분히 이국적이기에 매력적이다. 문화의 수집이라는 제도적 미술관의 사명을 수행할 수도 있다. 또한 미술관의 수집품 카탈로그에 새로운 분야를 추가한다는, 낭만주의적 아방가르드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미술관 내부와 외부의 차이로 미학적 유의미함을 만들어내려는 시도인 것이다. 아카이브의 특수한 공간으로서 미술관은 외부의 것들을 내부로 들여와 보존하고 박제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이 수집품들은 화폐로 셈해진다. 다원주의적 문화의 수집과 참석, 그리고 공허한 의견의 회집은 이 새로운 미학의 가치를 통화하는 화폐인 것이다. 이렇게 미술관 내부에 아카이브되는 화폐는, 가산되거나 감산된다. 이즈음에서 다시 질문할 수 있다. 내부와 외부에 존재하는 문화 객체로서 단독자들의 역능(puissance)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미술관이 새롭게 만들어내는 이 강도(intensity)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미술관 외부의 대중음악(혹은 연극)이 급작스럽게 내부로 진입될 때, 서로 만나는 객체들의 역능, 그리고 미학적 얽힘의 가능성을 비언어적으로(또는 언어적으로) 정교하게 설정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문화 현상이 될 수는 있어도 ‘창조적인’ 문화 현상은 될 수 없다. 이 새로움은 미술관의 수집품을 함께 화폐화의 가능성으로 밀어 넣으며, 미술관 자체를 일정한 화폐 가치로 대관 가능한 컨벤션 홀로 만들기도 한다. 새로운 것은 금방 바랜다. 미술관이라는 축적된 공간에서 공연과 연극을 보이는 것은 시간적 차이로서 새롭지만, 이 차이는 오히려 외부와의 공간적 차이를 없앤다. 미술관만이 제공하는 리얼리즘은 시공간적 특수성을 잃고, 문화 화폐의 집합소로서 기능하게 될 것이다. 긍정과 부정을 넘어, 이것은 미술관의 정체성 형성에 새로운 국면을 제시한다.
4.
그렇다면, 대중음악은 미술관에 들어감으로써 어떠한 정치적 의미를 획득하는가? 사이먼 레이놀즈(Simon Reynolds)는 기존 대중음악을 해체하는 개념적 음악들을 컨셉트로니카(Conceptronica)라 통칭한다. 언더그라운드 음악에 대한 반동주의 또는 분열적 아카이브로 등장한 이 컨셉트로니카는, 레이놀즈에 의하면 프로듀서에 의해 정치적 구호를 부여받는다. (레이놀즈는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이 지식인 계층임을 말한다.) 또한 레이놀즈는 그들의 음악이 단순히 음악적 변형이 아닌, 개념 미술의 감각 구축 방식과 닮아간다고 말한다.*** 시각-청각-촉각의 통합적 성격을 가진다는 말이다. 레이놀즈의 논의에 동의한다고 가정했을 때에, 그가 말하는 컨셉트로니카는 오늘날의 미술관에 성공적으로 침투한 듯 보인다. 그것이 개념 미술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술관에 입주한 이 새로운 언더그라운드 음악들이 입주 후에도 여전히 정치적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 음악들의 등장과 작동은 변증법적으로 실행되었다. 이들은 기존 클럽 음악의 해체를 위해 인더스트리얼과 IDM이라는 분열적 장르를 확대하여 새로운 반동주의 (혹은 좌파적 가속주의)를 주창한 것이다. 이 변증법은 ‘클럽’이라는 느슨하고 거대한 내재면에서 이루어졌다. 말하자면, 이 언더그라운드 음악들은 언더그라운드 클럽에서 재생될 때에 의도된 의미를 획득할 것이다. 미술관은 클럽이 아니다. 새롭게 발생한 언더그라운드 음악(컨셉트로니카)가 언뜻 개념 미술과 구축 방식이 비슷해 보이기에, 미술관은 그것들을 수집하는 것이다. 화폐화된 언더그라운드 음악들은 좌파적 견지를 잃고 순식간에 우파적 가속주의에 도달하게 된다. 레이놀즈는 새로운 음악 형식과 청취 방식에서 정치적 함의를 찾았지만, 사실 정치적 실천은 그뿐만이 아닌 특정한 장소에서 실행되었을 때에 가능하다. 클럽 음악에 대한 해체는 그것이 클럽에서 재생되었을 때에 진정으로 가속할 수 있다. 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은 도피이다. 러브 퍼레이드가 정치적 함의를 가졌던 것은 음악 형식의 ‘혁명’이 아닌 대중의 집합과 유희의 복잡한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여와 실천은 자장의 내재면에서 이루어진다. 계보를 제쳐두고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야 할 지침을 잃는 것이기도 하다.
5.
단편적인 만남으로 물신화된 연합을 이루는 것보다는, 차라리 만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오늘날의 미술, 음악, 연극 등의 분야들이 같은 방향으로, 또 같은 속도로 질주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서로 다른 방향을 가지는 직선을 균질한 기호로 약호화해 한 곳에 축적하는 것은, 그 공간을 중화하여 균질화된 화폐 단위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카바레 볼테르인가 여러 화폐가 모이는 행사장인가? 각자 돌아가지만 만나지 않는 톱니바퀴로 만든 아무 기능도 하지 못하는 기계 모형을 만들기보다는, 언젠가는 정교하게 맞물리는 톱니바퀴를 이용하여 새로운 기계장치를 건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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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is Groys, THE ROLE OF THE MUSEUM WHEN THE NATIONAL STATE BREAKS UP, Proceedings of the ICOMON meetings held in: Stavanger, Norway, 1995, Vienna, Austria, 1996 / Memoria de las reuniones de ICOMON celebradas en: Stavanger, Noruega, 1995, Viena, Austria,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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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to Steyerl, The Terror of Total Dasein Economies of Presence in the Art Field, dismagazine,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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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레이놀즈, 전대한 (역), 콘셉트로니카의 부상: 왜 최근 10 년간의 많은 전자 음악은 클럽보다 박물관에 속하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호랑이의 도약, 2020 링크: http://tigersprung.org/?p=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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