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집약적 환대

김주일
정승규 개인전: Fragmentation 展 (CR Collective, 2022.8.4. ~ 8.27.)

  이미지를 창출하는 기술과 그것을 전달할 매체의 형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졌지만, 시각성이 보유하고 있는 독보적인 위상 자체가 줄어든 적이 없다. 비디오는 라디오 스타를 죽였고(“Video Killed the Radio Star”), 인스타그램은 페이스북을 죽이려다가 그 품에 안기는 선에서 타협했다. 스마트폰 뒷면에 붙은 카메라가 환공포증을 일으킬 정도로 많아지면서 동시에 커지는 현상은 이미지 생산과 유포를 향한 인류의 끝없는 욕망을 잘 보여준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NOPE」을 흥미롭게 봤는데, 거기서도 결국 주제는 이것이었다: 이미지를 향한 욕망은 목숨마저 거리낌 없이 내던지게 한다.

  그런데 우리가 보고 있는 이미지는 그 자체로 완성된 하나의 진실인가? 혹은 일종의 과정인가? 혹은 거대한 진실을 투사하는 일개 파편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이미지에 매우 강력한 힘이 깃들어 있다는 전제하에 의미가 있다. 이미지란 언제나 의심스럽다. 하나의 이미지는 그것을 만든 사람의 의도와 제작과정을 시사하고, 나아가 그 사람이 속한 세상의 온갖 압력을 투사한다. 이미지는 언제나 인간의 오감 중에서도 가장 설득력 있으면서도 동시에 속임수에 가장 취약한 감각에 효과적으로 소구하였으며, 그러한 기능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권력자들은 이미지의 생산자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 노력은 단순한 회유나 협박에 그치지 않았고, 인류의 찬란한 문화유산들에 대한 파괴적 행위, 즉 성상파괴로까지 나아가기도 했다. 성상파괴에 깃든 내재적 욕망은 내가 가질 수 없는 강력한 이미지라면, 차라리 적의 손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완전히 부숴버리겠다는 것이다.

  정승규가 CR Collective(씨알콜렉티브)에 틀어 놓은 6개의 영상(3개의 시리즈)은 이미지의 힘, 그리고 그 힘이 동반하는 의심스러움에 관하여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는 매우 노동집약적인 방식으로 일한다. 우선 <Manipulation> 시리즈에서는 강력한 이미지 하나를 고르고, 여러 장을 인쇄한다. 여러 장의 이미지 중 원판 하나를 일종의 배경 레이어로 정하고, 그 이미지에서 쓸만한 부분, 즉 의심스러운 대목이나 역동적인 심상을 불러일으키는 개체를 복사하고 잘라 원판에 덧입힌다. 그렇게 수정된 이미지를 찍어 놓음으로써 하나의 프레임이 완성된다. 그리고 이 화면에 서서히 조작을 가하며 합성된 이미지를 찍는 행위를 반복한다. 이렇게 모인 이미지의 집합은 에드워드 마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식의 연속된 배치를 통해 운동감을 얻어 하나의 영상이 된다. 이제 우리가 보는 것은 강력한 이미지가 변형되고, 뒤틀리고, 재배치되는 ‘과정-결과물’이다.

  애초에 정승규가 전유한 이미지─위안부와 민주화 운동─는 단순한 한 장의 사진을 넘어 ‘굴곡진’ 이 시대의 역사적 진실을 증언하는 것으로 우리 공동체가 신화화한 일종의 성상이다. 여기에 뭔가 손을 댄다는 것,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주장한다는 것은 사회적 공감대의 울타리를 아득히 벗어나는 불경한 짓거리가 될 공산이 크다. 작가는 이러한 위험성에 맞서, 여러 가능성을 빠르게 병치한다. 그리고 미시적인 경우의 수들을 불명확하고 암시적인 은유의 수준에 살짝 걸쳐 놓는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했는지, 중간중간 초현실적 경계를 넘나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미시적인 전략을 앞서는 최상위의 전략은 무엇보다도 노동집약적 수고로움 그 자체이다. 혹자는 작가가 감히 성상에 손을 댔다는 사실, 혹은 작가가 제시한 대안적 해석의 암시가 불쾌할 수 있겠지만, 그 불쾌함은 노동의 흔적들이 켜켜이 중첩되는 과정에서 완고하게 누그러진다. ‘이 정도로 시간을 들여 고생했는데 뭔가 다른 의미가 있겠지, 좀 더 지켜보자.’라는 마음이 부상한다. 우리는 누군가의 고생에서 의미를 찾으려 한다. 이러한 욕망은 DNA에 각인된 공감 능력에서 기인하는 것이므로, 인류 공통의 본능에 가깝다. 내 고생의 의미를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만큼, 남의 고생에서도 의미를 찾아보는 것이다. 스톱모션 기법을 대략적으로나마 이해하고 있는 40대 직장인이 「월레스와 그로밋」을 시청한 경험과 다섯 살 어린이가 그것을 시청한 경험이 같을 수 있겠는가?

  정승규의 노동집약성은 전시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Tolerance>에서 그야말로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고전과 현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디선가 본 듯한 「주말의 명화」 급 영화 105편에서 165개의 장면을 발췌했다. 배경이 되는 하나의 장면 위에 다른 장면에서 따온 인물 혹은 사물을 거칠게 오려 붙인다. 작가는 콜라주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붓질로 인물을 뭉개거나 새로운 표정으로 덧칠하면서 전작인 <Manipulation> 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때 인물의 속내와 욕망을 거칠게 끄집어내는 터치는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에 가깝다. 그렇게 재구성된 이미지들이 다시 연속사진의 궤적으로 빨려 들어가 하나의 내러티브를 갖춘 영상이 된다. 8분 18초짜리 영상인데, 크레딧을 빼면 대략 8분, 초로 환산하면 480초, 초당 6~10개의 프레임을 썼다고 하니 대략 3,840개의 이미지를 만든 셈이다.

  근대의 도래 이후, 장인의 수고로움이라는 덕목이 미술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영토는 점점 좁아졌고, 이제는 말레비치(Kazimir Malevich)의 단색 캔버스나 드 쿠닝(Willem de Kooning)의 드로잉을 말끔히 지워버린 흔적도 위대한 걸작으로 재평가 받는 시대다. 묘사의 기술보다는 작가의 의도나 작품의 탄생 배경을 더 많이 묻는 시대다. 사실 정승규가 8분짜리 영상을 위해 만든 3,840개의 이미지 중 10~20개만 뽑아서 미술관에 걸어 놓아도 ‘아, 누구 개인전이구나, 아, 이 작품은 이러한 의도인가?’라고 중얼거리며 특별한 불만 없이 갤러리를 서성거릴 사람이 태반일 터이다(대신 부티 나는 액자에 넣거나 아예 기다란 새끼줄에 듬성듬성 걸어 줄 필요는 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몇 점의 ‘장난질’이나 혼성모방(pastiche)에 만족하지 않고 105편의 영화에서 수백 명의 이야기를 끌어다가 새로운 서사로 엮었다. 수고로움이 사라진 시대인지라, 역설적으로 그의 수고로움에 눈이 간다.

  여기에는 분명 익숙한 내러티브가 있다. 비밀을 간직한 한 남자가 광장을 지나 조심스럽게 한 건물로 몸을 옮긴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기다리고 있다. 두 사람은 자칫 이루어질 수 없을뻔했던 그 조심스러운 만남의 황홀감에 빠져 이내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달콤했던 시간도 잠시, 남자의 뒤를 캔 악의 무리가 두 사람의 보금자리를 덮치고, 여인은 무자비한 손에 이끌려 납치와 능욕을 당하고 끝내 목숨을 잃는다. 언제까지 가련한 여성들은 정의로운 남성 히어로를 유인하기 위한 인질로서만 소비되어야 하는가! 시간은 흘러 악의 무리는 그 세력을 날로만 더해가고, 악의 우두머리는 어느덧 민중의 구원자로, 불세출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하여 회합을 통해 세를 과시한다. 그 기세가 절정에 다다른 순간, 찬물을 끼얹는 우리의 주인공. 압제자를 향해 그는 살인자라며 악에 받쳐 돌격하지만, 이내 무지막지한 공권력에 의하여 제지되고 만다. 그리고 세뇌당한 민중은 그에게 도리어 돌을 던지며 저주한다. 아, 이건 마치 폰티우스 필라투스 앞에 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그는 기어코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운명인가? 그의 이상은 오직 뜨거운 피로서만 맞바꿀 수 있단 말인가? 그때 광분한 무리를 진정시키는 압제자의 낮은 목소리가 광장을 울리고 일순간 정적이 내려앉는다. 모두가 숨죽인 그때, 압제자는 입을 연다. 그를 놓아줘라. 나는 그를 이미 용서했다. 고로, 나는 관대하다. 군중은 압제자의 자비심과 ‘관용(tolerance)’에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그렇게 제국의 평화가 다시 찾아온다….

  첩보, 액션, 느와르, 갱스터물을 뒤섞은 클리셰의 연쇄적인 범람을 통해, 작가는 신화적인 사건의 저변에 녹아들어 있는 실제의 무수한 핏자국을 강조한다. 이 단순한 내러티브의 확대재생산을 위해서 그는 105개의 영화를 빌려와야만 했다. 이야기는 하나지만 인물도, 배경도, 화질도, 지역도, 시간도 계속 바뀐다. 세부적 구성요소가 계속 유동함으로써 결국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열린다.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 있고, 동시에 군중 속 1인도 될 수 있다. 또 한편으로, 예술의 제작방식이나 도구에 대한 ‘메타 예술’적인 질문도 던진다. 인류가 지금까지 추구했던 예술적 다양성을 향한 몸부림이 결국에는 하나의 이야기에 귀속되는 부차적인 도구에 불과했다면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이 짧은 영상을 위해 퍼부었을 작가의 작업시간과 장인적 수고로움을 떠올린다면, 이 질문에 대하여 아무렇게나 쉽게 툭 답을 내뱉지는 못할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노동은 우리의 숙고를 끌어냄으로써 궁극적으로 주제의식을 떠받친다. 압제자가 관용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 관용으로 이득을 본 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일찍이 ‘관용’이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오만함에 대하여 정확히 지적한 바 있다. 관용은 권력자의 단어다. 주체로서 관용을 언급하는 순간, 그 주체는 스스로 권력자임을 자임하는 것이다. 이 단어는 권력자가 자신의 영토나 재산을 무자격자로 상정된 누군가에게 내어줄 때 사용된다. 따라서 관용에는 조건이 있다. 즉, 내가 관용을 베풀었으니까 너는 고분고분해야 해, 너는 내 말을 잘 들어야 해, 이 정도 선에서 만족하고 돌아서야 해, 너의 단편적 여건을 개선해 줬으니 너의 내밀한 욕망 같은 것은 접어 둬, 라는 뜻이다. 사실 관용은 위계질서가 명확한 상황에서 가장 첨예한 갈등의 요인이 된다. 선진국은 개도국에, 행정부는 난민에게, 부모는 자식에게 각각 관용을 말하지만, 개도국과 난민과 자식이 애초에 기대했던 관용은 전혀 다른 지점에 있다. 그들의 진정한 욕망과 그것을 좌절케 하는 구조적 압력에 대해서는 아무도 진심 어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데리다는 ‘관용’ 대신 ‘환대(hospitality)’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환대는 집 나갔던 자식에게 벌리는 부모의 두 팔과도 같다. 조건 없는 포용이고, 적극적인 낮춤이다. 압제자의 관용 앞에서 자비심에 탄복해 눈물을 흘리는 군중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권력을 가진 자에게 우리가 요청해야 할 것은 관용이 아니라 환대이다.

  <Tolerance>에서 모든 인물은 특정한 누군가로 고정되지 않는다. 고로 언젠가 내 얼굴이 거기서 불현듯 튀어나올 수도 있는데, 그렇더라도 전혀 놀랄 일은 아니다. 다만, 거기서 내가 어떤 배역을 맡고 있는지가 궁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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