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드 인 경상도> 띄엄띄엄 관찰기
깔끼..? 피식대학의 《메이드 인 경상도》(이하 《경상도》)를 처음 봤을 때 경상도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하다. 경상도 사투리 아닌 것 같다, 혹은 재미없다. 그도 그럴 것이 경상도 사람들에게 짭투리는 그렇게 새로운 주제가 아니다. 오히려 새롭고 신선한 것은 제대로 된 사투리인데, 최근 조국이 부산을 찾아 “고마 치아라 마”를 시전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거센 파도”를 일으킨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1] 반면 <그것만이 내 세상>의 윤여정은 고작 3개월 공부하고 사투리 연기에 도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경상도 사람은 그 도전이 지겨웠겠지만, 애초에 서울 사람에게 사투리 따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상도 사람은 그것이 경상도 사투리가 아니라는 사실 말고는 다른 관심이 없다.
툭과 탁과 씹뽕구리의 삼각관계
니 어데 출신이고 묻기 좋아하는 경상도 스타일로 따지고 들자면, 이용주는 부산 출생이라곤 하지만 어렸을 때 수도권으로 이사와 사투리 냄새를 1도 풍기지 않으며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는 호주에서 살아서 영어도 비교적 유창하다고 한다. <피식쇼>가 월드클래스를 표방하며 영어로 진행될 수 있는 핵심적인 이유이며 여기서 물론 가장 큰 기여를 하고 있는 사람은 단연 이용주이다. 이용주는 누가 보더라도 부산 사람이 아니다. 이게 본캐다—과장 좀 섞자면 그는 정말로 ‘월드클래스’이지 않을까? 그럼에도 본캐를 거의 가공 없이 그대로 차용해 온 《경상도》에서, 이용주는 자신을 부산 사람이라고 억지 주장한다. 그리고 이 억지 주장은 코미디 구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바퀴벌레를 뜻하는 바쿠쌉꿀마를 비롯하여 지금도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 깔끼까지, 경상도 사람 본인이 그거 경상도 말 아니에요 해도 오히려 그를 호통치며 가르치려고 달려든다. 누가 봐도 무지성 버티기 모습이 애처로우면서도 굳이 그 많은 지역 중에서도 잘 하지도 못하는 경상도 말을 향한 열정의 원천을 알 수가 없다. 웃음 포인트가 여기쯤인 듯하다.
한편 이용주는 김민수의 경멸의 눈빛을 정통으로 맞는다. 《경상도》의 김민수와 정재형은 모두 이용주 캐릭터를 좀 더 뚜렷하게 만들어주는 안티테제로 역할한다. 김민수는 본래 경상도, 울산, 순수혈통, 그러니까 진리나 원본의 자리에 서서, 존재 그 자체로, 이용주의 떳떳하지 못한 모습을 저 반대편으로 상대화한다. 김민수는 이용주의 말을 받아 줄 필요가 없다. 인상만 써도 된다. 아무 말이나 해도 된다.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존재 자체가 진리의 자리에 서있기 때문이다. 《경상도》에서 김민수라는 원본의 존재로 인해 이용주의 열등함—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순식간에 이미 서울 사람이 되어 있다—이 자동적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으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미에서 웃긴 것이다.[2] 출신에서 밀리는 이용주는 김민수를 회유할 수밖에 없으며, 실제로 《경상도》에서 이용주가 김민수에게 보인 태도는 정재형과는 사뭇 다르게 사뭇 호의적이다. 본토 사람 김민수 앞에서는 다소 억지도 쓰지만 결국 비굴한 자세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도 같은 의미에서 웃긴 것이다.
반면 정재형은 대구 출신 부모를 두었지만 서울에서 나고 자란, 너무나 처음부터 서울 샌님으로서, 경상도 호소인의 또 다른 안티테제가 된다. 어느 에피소드에서 이용주는 나머지 둘과 술을 마시며 김민수와는 같은 경상도끼리 “툭 하면 탁” 통할 것 같은데 정재형은 그렇게 될 수 없다고 선을 긋는다—왜냐하면 그는 “씹뽕구리”이기 때문이다. 이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시뮬라크르 사이의 관계와 꼭 닮았다. 김민수가 이용주에게 쿠사리를 줄 수 있다면, 이용주 역시 정재형에게 쿠사리를 줄 수 있다—갈수록 경상도 본적이란 원본에서부터 멀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소 부조리하더라도, 이용주는 정재형이 자신보다 훨씬 경상도 사투리를 잘 구사할 수 있을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용주는 계속해서 그를 서울 사람으로 위치시키려고 애쓴다.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생략이다. 《경상도》에서, 최소한 초반에는 정재형의 분량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적었는데, 이는 마치 아다치 미츠루가 자주 자신이 손수 만든 빌런을 만화에서 재현하는 방식과 꼭 닮았다—예를 들어 감독에 잘못 찍힌 엑스트라처럼, 『H2』에서 키라는 한 번도 그럴싸한 장면을 얻지 못한다.[3]
위에서 서술한 이용주와 김민수, 정재형 3인의 구성적 대립은 《경상도》에서 장소가 바뀌어도 한동안 반복되는데—각 인물의 특징이 현실로부터 그대로 차용되었다고 하더라도—이 부분만은 상당히 작위적이란 인상이다. 로드무비 류의 다큐멘터리라고 보기에, 《경상도》에서 모든 인물은 서로 간 갈등을 일으키는 인물 구도를 십분 이해하고 있다. 이것은 극 바깥에서 합의된 것으로, 극 안에서 인물은 회차가 진행되더라도 마치 이런 설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해소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다시 말해, 이용주의 경상도 호소에 다른 출연자는 어느 정도 장단을 맞춰주면서 긴장 관계를 유지하는데 이는 다분히 의도된 것이다—상식적이게도 이용주가 정말로 현실에서 바퀴벌레의 경상도말이 바쿠쌉꿀마로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
이런 이유 때문에 《경상도》는 비록 다큐멘터리의 외양을 하고 있더라도 한없이 시트콤에 가까워진다. 관례적으로, 시트콤의 전개는 결함 있는 인물이 등장하고, 곤란한 상황이 주어지면서 인물이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좌충우돌 무언가를 시도하지만 그럴수록 상황은 악화되고 결국 그 상황은 그 인물이 가진 한계를 넘지 못하고 종결되며, 같은 문제가 같은 인물에게 다른 상황이 주어지며 그때마다 인물은 전 회차와 비슷하게 고통 받고 비슷하게 해결된다.[4] 《경상도》도 대략 그랬다. 여기까지가 초기 설정.
설정 붕괴가 시작되고..
이용주의 우기기가 좀 지겨워질 때쯤, 김민수가 이를테면, 갑자기 말이 많아진다. 극 중에서 이용주는 김민수가 컨텐츠가 망할 것 같아서 심드렁했다가 슬슬 주목받으니 태도가 바뀌었다고 지적한다. 어쨌든지 간에 김민수도 이용주만큼 웃기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선 경상도 호소인인 이용주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그 설정에 경상도 자부심이 피 속에 녹아 혈관을 타고 흐르는 찐 경상도 싸나이 설정을 여기에 덧붙인다—시끄럽게 오버하는 경상도인의 전형적인 모델은 강호동에 가깝다. 김민수는 이제 이용주를 무시하거나 냉소하는 차원을 넘어서 진짜 경상도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어하기도 하는데—예를 들어 “내 한 마디만 해도 돼요?”를 시끄럽게 반복해 외치는 대사—이로써 이용주의 결함이 웃음의 핵심이었던 초기 설정은 애매해지거나 최소한 복잡해졌다. 거듭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미에서 만약 웃음이 열등한 악인의 모방에서 나온다면 말이다.
하나의 열등함은 주지하다시피 불완전한 경상도인 그 자체에서 나온다. 하지만 다른 하나의 열등함은 경상도의 지나친 과잉에서부터 출현하는 것 같다. 이 인물의 성격, 그러니까 여기서 모방하는 경상도 남자는 독선적이고 목소리 크고, 자존심과 고집은 세고, 항상 진심을 남발하는 진정성주의자로, 오늘날 감각에서 별다른 설명 하지 않아도 ‘꼰대’라고 일축될만한 하다. 이런 구도 속에서 이용주는 김민수에 비해서 정상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이용주는 꼰대의 시뮬라크르이지만 김민수는 꼰대의 이데아이기 때문이다. (하나 짚고 넘어갈 점은, 《경상도》 김민수의 성격은 이미 <한사랑산악회>에서 김영남이란 인물에서 시험된 적 있으며, 《경상도》 본편에서도 나오는 바이지만. 실은 그의 아버지 김성왕씨로부터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그러니까 《경상도》의 김민수는 여전히 현실의 김민수는 아닌 어떤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모방이다.)
다른 한편에서 정재형도 말을 하기 시작한다. 이용주에게 무시당하고 컨텐츠 자체, 즉 세계관으로부터 생략당하기 일쑤였던 정재형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대구 사투리를 구사하면서 오히려 이용주보다 김민수와 티키타카를 시전한다. 한쪽에서는 정재형이 순수 서울 혈통의 샌님인데, 다른 한쪽에서는 대구 출신 부모로부터 엘리트 경상도 말 교육을 받은 수재이다. 실로, 정재형은 이용주 초기 설정을 업그레이드한다. 억지 주장이 억지가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로 더욱 능란하게 구현해내는 것이다—정재형은 서울 출신이지만 사투리를 그 정도까지 하는 것 보면 이미 쏘울은 대구 맞다 같은. 여기에 이용주가 낄 자리가 없으며 이쯤에서 점점 더 초기 설정—경상도 호소—을 지켜나갈 의지를 잃어버리는 듯하다. 극중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여러 번 지적되듯이, 이제부터 이용주는 서울말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을 자주 까먹기 시작한다.
이런 설정 붕괴 속에서 김민수와 정재형은 이용주가 용인(수지)과 호주 출신이라는 것을 《경상도》에서 공식화한다. 이용주는 이제 억지주장을 ‘호소’하지 않는다. 다만 김민수에게 경상도인임을 ‘증명’해야 한다. 다른 한편에서, 이용주는 정재형이 더욱 완벽하게 모방해한다는 점에서 이제 경상도인인 척 하기 힘들지만, 서울 사람 아닌 척 하기도 힘들다. 이용주의 역할이 미묘하게 바뀐다. 이제 웃음 포인트는 ‘경상도 호소인’이 아니라 경상도 사투리를 따라하는 서울 사람에게 찐 경상도 바이브를 알려주는 ‘경상도 자처인’—김민수—에게 넘어갔다. 지금까지 논의에서 이 순간은 매우 중요한데, 비로소 이용주의 본모습에 가까운 무엇이 등장하기 때문이다—서울 남자.
여기까지 따라왔다면, 《경상도》에서 이용주가 서울사람화 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아슬아슬하지만, 김민수와 정재형이 웃기려면 이용주가 서울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 밖의 선택지가 없었으리라는 점도 함께 이해하리라 믿는다. 이제 영양까지 오고 나면 이들 모두 진정한 경상도 남자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이제 《경상도》에서 이들에게 중요한 것이 ‘진정한 경상도 추구’가 아닌 것이다. 이용주는 경상도 호소를 거의 포기한 반면, 김민수는 경상도 꼰대 아재라는 구시대 유물을 뒤쫓는다. 정재형이 경상도 연기를 잘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서울 출신임에도’란 단서 속에서 흥미롭다.
경상도 없는 영양
돌아가서, 《경상도》의 출발은 경상도 스테레오타입의 인물을 연기해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는 것으로, 주지하다시피 <한사랑산악회>의 김영남 같은 인물에서 이미 시험된 바가 있다. 김영남을 연기한 김민수는 경상도 바이브를 연기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용주는 그렇게 할 수 없었기에 ‘경상도 호소인’이 되었다. 경상도 호소인이란 말을 마음만은 진정한 경상도인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일 수도 있다. 이용주가 극중에서 흉내 내고 있는 부산 남자의 특징이 약간의 힌트를 주는데, 예를 들어 목소리가 크고 통이 크고 무대뽀 기질이 있으며 등등.. 이용주가 흉내 내는 건 진짜 싸나이, 부싼 싸나이, 남성적 카테고리의 전형으로, 현실의 경상도 남자라기보다는 미디어에서, 그러니까 <친구> 같은 영화가 재현하는 부산 조폭의 이미지와 더욱 닮았다.
아마도 레이 초우(Ray Chow) 같은 비교문학자는 《경상도》의 이용주가 매혹된 야만적 이미지를 원시적인 것(the primitive)이라고 부를 것이다. “서양 모더니즘이라는 형식의 발명이 비서양의 땅과 사람들을 계속해서 원시화한다는 것(primitivization)과 표리일체를 이룬다.”[5] 잘 알다시피 피카소, 세잔, 고갱, 마티스 등 모더니스트 화가가 원시적인 것을 가지고 서구 모더니즘을 ‘발명’하는 것과 타자가 원시화하여 ‘원료’로 사용되는 것은 등가교환된다. 만약 그렇다면, 《경상도》에서 이용주의 경상도인 호소, 억지 주장은 진정한-경상도인-추구를 위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경상도는 나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으면서 쾌락을 얻을 수 있는 여가의 장소, 바꿔 말하면 바로 그 장소, 경상도인을 호소하면 할수록 역설적으로 내가 서울 사람으로 있을 수 있는 바로 그 우월감에 매혹된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경상도》의 이용주는 너무나 서울 사람에 가깝거나 너무나 경상도 사람으로부터 멀다.
그러고 보면, 《경상도》는 출발부터 아슬아슬한 코미디였다. 이용주란 인물이 가진 가장 본질적인 문제, 중심의 우월성은, 최소한 초반 설정에서는, 지방—김민수—에 의해 안에서부터 견제되었다. 하지만 김민수가 인물의 정체성을 꼰대—경상도 사람도 싫어하는 경상도 사람—로 전환하면서 구성적 대립이 극 내부에서 사라졌다. 그럼 어디로 갔을까? 실제 영양 사람들로 향하지 않았을까? <영양 편>을 보면 3인조의 정제되지 않은 웃기지도 않은 말을 무리하게 해댄다. “할매 살 뜯는 맛” “부대찌개 같은 맛” 등등. 이들이 자신들의 말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몰랐을까? 그럴 리가 없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들은 이 시퀀스가 괜찮다고 보았을까?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의 웃음은 상식보다 더 망가지는 모습을 보는 데서 나오는 것 같다. 구봉서는 1997년의 자서전에서 “사람들은 배삼룡이 바보스러운 말을 하는 걸 보며 우월감을 느꼈다”고 썼다.[6] 코미디언은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 바보를 자처해 왔다. 《경상도》의 3인조 역시 경상도 사투리라고 괴상한 말을 우기거나 이제 사장된 경상도 꼰대들의 습관적인 어투를 따라하며 그렇게 했다. 여기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영양편>에서도, 3인조는 자신들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울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 같다. 그 예상은 적중했다. 다만 그것이 미적 가상 안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이유는 우스꽝스러움을 알아봐주는 역할이 이미 내부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역할을 《경상도》는 피사체에게 넘겼다. 하지만 최소한 극 안에서는 그들은 반격하지 못했다—얼어붙었을 뿐이다. 잘 알다시피 <영양편>은 외부의 강력한 비판을 맞고 소위 ‘나락’의 문턱까지 갔다. 혼쭐이 난 나쁜 아이들은 이제 마음을 고쳐먹고 거의 공익 광고 모델처럼 영양을 홍보하기에 나섰다. 내가 피식대학을 보지 않게 된 시점이 여기서부터였던 것 같다.
지켜야할 선과 코미디의 운명
몇 가지 남은 딜레마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전설적인 꽁트인 <봉숭아 학당>에는 손가락으로 배트맨 흉내를 내는 맹구라는 인물이 나온다. 돌이켜 보면 맹구는 뇌병변 장애인을 흉내 낸 것이고 오늘날 같았으면 장애인 비하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중요하게도 웃기는 건 고사하고 불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 그 시절 우리는 맹구가 손을 쳐들며 등장하길 기다렸고 그를 보고 웃었고 대개 여기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현재의 관점에서, 맹구를 약자의 반윤리적인 재현으로 평가해야할까? 아니면 역사적 한계라는 박스에 갇혔을 뿐이라는 변명거리라도 만들어줘야 할까? 오늘날의 시청자는 과거보다 윤리적으로 우월한가? 맹구를 보고 웃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던 시대에 태어난 운이 좋은 공모자였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때도 지금처럼 맹구를 비판했어야 더욱 옳았을까?
누가 맹구의 배트맨을 흉내 내면 다들 하나둘씩 따라서 배트맨을 외치며 흉내 내면서 놀았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본다. 그 시절 학급에는 으레 장애인이 한두 명씩 있었고 자주 (선생님 포함해) 누군가에게 놀림감이 되기도 했고, 물론 그건 큰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그를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당시엔 오늘날 같은 윤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필요 없었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때 장애는 결함이기도 했지만, 그냥 딱 그 정도,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크게 주목할 필요 없는 특징이기도 했다.[7] 한편 주호민 사건을 통해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장애 가족은 자식이 일반학급에서 공부하는 걸 간절히 원하는 반면, 비장애가족은 그것을 거부하고 있다는 현실이다.[8] 그렇다면 오늘날 장애 가족이 간절히 바라는 학급의 모델은 역설적이게도 봉숭아 학당이 더욱 가까울 수도 있다.
<영양편> 같은 일이 벌어지면 많은 사람들은 ‘가장 큰 문제는 재미가 없다는 것’이라고 지적하곤 한다.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실패한 농담의 미래가 처벌이라면 누가 죽자고 농담을 할까? 혹은 역설적이게도 이 시대 농담은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비장한 일이라도 된 걸까? 움베르트 에코(Umbert Eco)는 「텔레비전에서 동네의 바보를 알아보는 방법」이란 에세이에서 오늘날의 가능한 코미디가 무엇인지 검토한다. 그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코미디는 “불구자나 소경, 말더듬이, 난쟁이, 뚱뚱보, 백치, 일탈자, 평판이 나쁜 직업, 열등 민족으로 간주된 겨레,” 즉 답도 없이 열등한 것을 흉내 내며 사람들을 웃겼다.[9] 하지만 오늘날 “차이를 존중하는 사회”에서 그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에코는 이 변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옛날에는 마음 놓고 노예를 비웃는 데서 주인임이 인정되었지만 오늘날에는 마치 노예들만이 주인을 조롱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10] 에코가 보기에 현대사회가 찾아낸 “정치적으로 올바른” 웃음을 위한 해결책은 멍청하고 때로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노출증 환자를 찾아 직접 무대 위에 올리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관객은, 정의의 편에서, 안심하고 저 멍청함을 비웃을 수 있다. 멍청함을 자처하는 조회수에 목마른 유튜버. 조건은 이미 갖추어져 있다. 문제는 타이밍이다.
<영양편> 이후 대중적 분노에 발 빠르게 화답한 공권력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영양군수는 《매일신문》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피식대학을 정면으로 비판했으며, 경상북도에서도 “대응 매뉴얼”을 마련하겠다고 했다.[11] 많은 뉴스가 이 사실을 대서특필했다. 《JTBC》는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의 지역 비하 발언”이라고 일찌감치 헤드라인을 잡고 몇 차례 후속 기사를 썼다.[12] 박명수는 KBS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코미디언이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13] 마치 온 나라가 피식대학의 존재를 부정하는 듯 보였다고 하면 과언일까? 10여 년 전 박정근 씨는 북한 찬양 게시물을 리트윗하여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끼칠 명백한 위험”이란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적용받아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여기에 대해 법학자 홍성수는 한 칼럼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사회계약’을 통해 농담할 자유, 그걸 보고 웃을 자유, 그리고 하나도 안 웃기다고 비판할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실패한 농담에 대해 형벌권을 발동할 권한을 국가에 부여한 적은 없다”고 썼다.[14] <영양 편>을 보자면, 피식대학 역시 누군가를 불쾌하게 만든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실질적 해악을 끼칠 명백한 위험”이란 건 존재하지 않았다—오히려 빵집은 매진되었으며 영양이란 도시가 실존한다는 것을 전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최소한 <영양 편> 이후의 전개 양상에서 실제로 작동한 것은 홍성수가 말한 “비판할 자유”보다는 “형벌권을 발동할 권한”에 가깝다. 영양군수와 경상북도는 연예인 잡것에 분노하며 복수를 다짐하는 듯 보였고, 마치 오노 요코(Ono Yoko)의 <조금씩 잘라내기(Cut Piece)>에서 그랬듯이, 좋아요를 하나씩 감질나게 빼고 있던 그들에게 매우 묵직한 –1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여기에 감히 “비판의 자유” 따위가 진짜로 어디에 있을까? 대신, 그보다 앞서, 실질적인 처벌, 즉 연예인 경력과 생계를 쥐었다 펴는 나락/극락 보내기가 이미 이루어졌다. 떠오르는 비유가 애니메이션이라서 미안한데, <페이트>에 등장하는 쿠훌린이란 랜서가 가진 ‘찔러 뚫는 죽음의 가시 창’은 상대의 심장에 명중했다고 하는 결과 뒤에, 창을 상대에게 던지는 원인을 끌어내는 인과역전 회피불가의 필살 보구이다. 내게는 나락이란 게 그렇게 보인다. 일단 먼저 죽여 놓고 이유는 나중에 있던지 말던지다. <영양 편> 이전에도 이후에도 시청자는 영양이 뭔지라던지 관심이 별로 없을 것이며, 지방소멸은 북극곰이나 팽귄의 소멸과 비슷한 느낌으로 들릴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양 편> 이전이나 이후나 영양군수는 잘 먹고 잘 살 것이다. 피식대학은 재미없으면 안 보면 된다. 어차피 좋아요 하나 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 이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 지원 특별 기고로 게재되었습니다.
[1] 강진구 기자, 「’기세등등’ 조국… 고향 부산 찾아 尹 겨냥 “이제 고마 치아라 마”」, 《한국일보》, 2024 3. 21.,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32110330000050, (접근: 2024. 11. 28.)
[2]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천병희 역, (문예출판사, 2004), 31, 43쪽.
[3] 이로부터 정재형 왕따설이 불거져 나왔는데, 《경상도》는 000 에피소드에서 이를 곧장 컨텐츠화 했다.
[4] 주창윤, 「로맨틱 시트콤의 장르관습과 미학: 남자셋 여자셋을 중심으로」, 『한국언론학보』, 43, 1999, pp. 17-18.
[5] 레이 초우, 『원시적 열정』, 정재서 역, (이산, 2004). 42쪽.
[6] 양지호 기자, 「“웃기 떄문에 행복한 거예요. 웃어야 복이 오는 거예요.”」, 《조선일보》, 2016. 8. 29.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8/29/2016082900581.html, (접근: 2024. 11. 28.)
[7] 다음 글에서 묘사하는 80년대 상황을 읽어 볼 것. 장우원, 「’장애’가 불편하지 않는 세상」, 《은평시민신문》, 2019. 11. 25., https://www.ep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17293, (접근: 2024. 12. 5.)이는 장애를 특별하게 대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역설적이다.
[8] 김세훈 기자, 「주호민 자녀 전학 배경에 “장애인 많아진다” 민원 있었다」, 《경향신문》, 2023. 8. 14. https://www.khan.co.kr/article/202308131810001, (접근: 2024. 12. 5.)
[9] 움베르트 에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이세욱 역, (열린책들, 2009,) 이후 인용은 모두 여기.
[10] 이런 관점의 기사로는 다음을 볼 것. 박돈규 기자, 「영구 50년, 바보 캐릭터 다시 볼 수 있을까」, 《조선일보》, 2021. 10. 13. 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1/10/13/G6ABD5X2KZGNNOYHES2ZOAIVLE/, (접근: 2024. 12. 5.) 하지만 에코가 지적했듯 ‘권력을 비판하는 바보’는 정의로울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전복적일 수 없다는 점에서 웃기기보단 처량해진다.
[11]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 영양 비하 발언 논란… 경북도 “대응 매뉴얼 만들 것”」, 《매일신문》, 2024. 5. 16. https://imaeil.com/page/view/2024051618134546056, (접근: 2024. 11. 28.).
[12] 「피식대학 지역 비하 ‘시끌’…해당 업주도 “조금 무례했지요” [소셜픽]」, 2024. 5. 17., https://news.jtbc.co.kr/article/NB12196564?influxDiv=JTBC, (접근: 2024. 11. 28.)
[13] 「박명수, 피식대학 일침 “지켜야 하는 선 있어”」, 《뉴시스》, 2024. 5. 27. https://www.newsis.com/view/?id=NISX20240527_0002748966, (접근: 2024. 11. 28.).
[14] 홍성수, 「[세상 읽기] ‘실패한 농담’까지 처벌해서야」, 《한겨레》, 2012. 11. 25.,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562210.html, (접근: 2024.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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