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적, 표면으로서 무빙 이미지
이제 이미지들은 유토피아를 창출하고자 하는 목표를 갖지 않는다.
– 데이비드 조슬릿
[비디오] 프로젝션을 수용하자 이미지와 관람객과 주위 구조물(architecture) 간의 관계가 급격하게 달라졌다.
– 에리카 발솜[1]
백남준아트센터는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생중계 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의 4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에서 백남준의 1977년 텔레비전 작업 <과달카날 레퀴엠 Guadalcanal Requiem>(1979년 재편집)을 영사(projection)했다. 관람 동선상 첫 작품으로, 적어도 그렇게 의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싶었다. 미술관 안내데스크 맞은 편 검은색 주조의 홀을 새롭게 구획하여 프로젝터, 스크린을 천장에 매단 상영 공간은 어둡게 가림막 된 엄밀한 의미에서 블랙박스는 아니다. 자연채광이 아트센터 고유의 프레임 파사드를 통과해 실내로 유입되고 있었고 광선은 반투명의 짙은 회색 유리에 꺾여 흩어졌다. 프로젝터의 광선만으로 상영에는 무리가 없었다. 홀의 바닥에는 기다란 검은 들보(beam)의 구조체가 영상 관람을 돕는 의자로 몇 줄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TV 정원>(1974/2002)이 (상설 전시되고) 있었는데 미디어 정원의 생태를 조망할 수 있도록 일종의 덱(deck)을 살짝 높여 설치한 경관 구조 탓에, 또 다른 건축적 조성물처럼 보였다. 여기에서 스크린 위의 무빙 이미지는 실내외 또 다른 이미지와 중첩되며 더불어 흘러갔다.[2] 여기, 모더니즘적 공간에서라면(모더니즘 건축이 ‘기계-되기’를 추구했다는 점을 기억해 두자), 스크린도 프로젝터도 여타의 영상 장치도 건축적 장식처럼 보일 것 같았다. 건축적 디자인을 배경으로 스크린의 사각 프레임에 투영된 ‘과달카날’의 무빙 이미지는 전시의 큐레토리얼을 뒷받침한다는 점에서 기능적이기도 했고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에 매달려 장식적이기도 했다.[3]
<과달카날 레퀴엠>은 텔레비전 방송국의 시대에 만들어졌으나 적어도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비디오가 텔레비전을 ‘죽인’ 이래 오리지널 형식과 상관없이 반복 재생된다. 그 같은 변화는 주목할 만한 것은 아니다. 확실히 디지털 기술은 전자 장치를 죽였고, 조각으로서 텔레비전도 비디오도 끝장난 것처럼 보인다(오늘날 미디어 고고학이 다루는 것이 이것이다). 컴퓨터를 저장, 재생장치로 하고 프로젝션, 액정화면(LCD)을 통해 거의 무엇이나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게 된 지금 미디어는 제2의 자연이 되었다.[4] 그렇다면 고유한 매체가 시대를 가로질러 기술의/전시의 생태에 따라 변형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변형도 작품의 경험을 근본적으로 반복시키는가?[5] 백남준은 “브라운관(cathode ray tube)이 캔버스를 대체할 것”이라고 믿은 부류였다.[6] 과연 건축 안팎의 디스플레이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디지털 정보 디스플레이(DID), 미디어 캔버스, 미디어 파사드, 미디어 큐브 같은 디스플레이가 확산하면서 무빙 이미지와 스크린의 의미는 다시 변화하고 있다. 스크린은 건축적인 것, 표면으로서, 너무나 낯익은 미래의 채널이 되고 있다. 그것은 어떤 변형이며, 어떤 경험인가?
1976년 백남준은 뉴욕 공영방송국 WNET의 아티스트 레지던시 ‘TV실험실’(TV Laboratory)에 머물면서 매체 특정성을, 비디오 신시사이저나 비디오 편집 시스템 같은 테크놀로지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해 백남준은 호주 존 칼더 아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남서 태평양 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을 촬영한다. 1942년 8월부터 1943년 2월 사이 과달카날에서는 일본군과 연합군 간의 치열한 소모전이 있었고 그 섬에는 2차 세계대전의 무수한 전사자가 (특히 일본군의 유해가) 묻혀 있었다. 영상은 전쟁에 대해 숙고하면서(“전쟁이 무엇이냐고? 좋은 질문이네, 좋은 질문이야.”), 발견한 기록 푸티지와 퇴역 군인의 인터뷰와 전쟁-기계에 ‘충격’을 받은 자리(site)와 백남준과 샬럿 무어만의 퍼포먼스를 적당히 섞어 만들었다.[7] <과달카날 레퀴엠>은 표면적으로 전쟁을 혹은 그 폭력으로부터 회귀한 유령을, 영상 말미 원주민의 말을 빌리면 “기념하기 위한 방식”이다. 형식적으로 보자면 주사선을 왜곡하거나 컬러 채널 믹스 같은 영상 합성 테크닉을 흑백의 아카이브나 현지에서 촬영한 컬러 클립의 표면에 꿰어 붙여, 역사’적’ 이미지를 “괴롭히면서” 추상화하고 있다.[8] 크레딧이 올라간 후에도 비디오에는 솔로몬 주민을 인터뷰한 일본 아사히 텔레비전의 클립(“다가오는 7월 솔로몬의 독립에 대해…”)과 ‘TV 실험실’이 만든 백남준에 관한 다큐멘터리 중 <백남준 텔레비전을 위한 편집>이 덧붙여 있다. 부가 영상이 덧대진 이유는 다소 모호한데, 1977년 완성한 비디오는 재편집되어 1979년 뉴욕 WNET에서 방송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 과잉 정보 때문에 소호에서는 사람들이 미니멀 아트를 하는 것 같아요. … 나는 공격적인 작가예요. … 사실 뉴욕에 와서 나는 맥시멀 해졌어요.”[9] 백남준이 뉴요커의 기자에게 한 말이다. 백남준은 초창기 텔레비전 작업을 플럭서스(Fluxus) 행위의 연장에서 다소 미니멀하게 조각적으로 접근했다. 스스로 텔레비전 작업의 원형이라고 평한 〈TV 왕관〉(1965/1999)이나 <자석 TV〉(1965)가 그렇듯 브라운관에 나타난 하나의 선이나 그가 “댄싱 패턴”이라고 부른 조형 형태는 분명 선(禪)적이고 소호적인 미니멀한 것이었다. 확실히 <과달카날 레퀴엠>은 맥시멀 하다. 시퀀스는 과잉으로 결정되어 있다. 이를테면, 과다카날 토착민의 진술이 솔로몬의 풍경을 통과하며 퇴역 장군의 회상으로 점프 되고, 유해를 수습하러 온 일본 관료(?)의 방문과 대통령이 되기 전의 케네디를 구한 선주민의 무용담(?)이 솔로몬의 미래와 몽타주 되고, 샬럿 무어만의 이중적 목소리가 (화면의 목소리나 내레이션으로, ‘빨리 감기’의 시간 위에서) 떠다니고, 백남준과 무어만의 수행적 행위(performative act)가 끊임없이 밀려닥치는 이들 이미지의 흐름(flux)에 개입한다. 그것은 여전히 초기의 설치 조각의 흔적으로부터 확장하면서, 텔레비전이 가졌던 정보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과장하여 실험한 것이다. 가장 맥시멀한 이미지는 해골과 미국의 참전 군인이 오버랩 되는 시퀀스다. 백남준은 미디엄/영매로, 지옥 같은 전쟁의 경험에 갇혀 있는 듯한 퇴역 군인의 얼굴을 반복하여 조작해(“마치, 림보에, 마치, 림보에, 마치, … 있는 것 같아.” 여기서 림보라는 말은 8번이나 반복된다!) 무어만의 목소리(“이때쯤 우리 현장 팀에 사고가 일어났어요. 우리는 갈 곳을 잃고 떠도는 귀신들의 짓인지 궁금했어요”)와 군인의 유해가 묻힌 자리와 연결하면서, 전쟁의 ‘충격을 받은’ 그 이미지를 영상 합성 기술로 괴롭혀 만든 추상 테크닉을 통해 해골-귀신과 접신해, 적어도 세 곳 이상의 세계/시간을 ‘실시간으로’ 연결하고 있다(과거-현재, 정신-육체, 이세상-저세상). <과달카날 레퀴엠>의 이미지는 음극선관의 발전에 기인한 것이지만, 정보의 저장 능력과 정보 사이의 결합 가능성과 연계하고 있다.
정보 과잉의 이미지 브리콜라주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사회적 통합을 위한 잠재성(virtuality) 즉 미래에 대한 (다소 모호한) 긍정이다.[10] 백남준은 7년 뒤 아폴로 달 탐사대가 과달카날에 발 내릴 수 있는 위성 방송의 시대를 예견한다. 미디어의 환희(매체 연구의 발명자인 매클루언의 유명한 주장, ‘이제 지구는 서로가 연결되어 이웃하는 마을이다!’)가 <과달카날 레퀴엠>이 나르는 일차적 정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때 백남준의 환희는 의도적 과잉 탓에 오히려 뒤틀려 있다. 할 포스터는 현대미술 전체에 대한 주요한 독해 구조로 “관조와 오락, 비판과 공모, 수작업과 기계작업,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재현과 추상”의 대립을 제시한다.[11] 백남준은, 할 포스터가 분석한 팝 아트 작가들과 같이, 그 같은 구조를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 테크닉을 과도하게 활용하면서 그 양자를 모호하게 취급한다. “정보 고속도로”에서 접속의 환희는 ‘과달카날’에서 분명치 않다. 그렇지만 백남준이 매체의 정보 저장 능력과 매체적 이미지 결합 실험에 ‘성공’하면서 어쨌든 ‘레퀴엠’은 희망으로 승화된다. 백남준이 말한 공격성이나 맥시멀리즘 즉 과잉의 이미지는 이를테면, 영국의 소설가 J.G. 발라드가 1973년 <크래시!>의 세계를 그리며 예견한 이미지이기도 할 것이다. “20세기를 지배해 왔던 이성과 악몽의 결합은 종래 없던 모호한 세상을 창조했다. 정보통신 지형 전반에 걸쳐 불길한 테크놀로지의 유령과 돈으로 살 수 있는 꿈들이 떠다닌다. 수소폭탄과 [청량] 음료 광고가, 광고와 주작(pseudo-event), 과학과 포르노가 지배하는 현란한 세계에 공존한다.”[12]
이 같은 변화가 지닌 미묘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과달카날 레퀴엠>을 “정보를 도식화한 납작한(flat) 기록물의 표면”[13]으로, 즉 70년대 팝 아트 시대의 회화에 대한 유익한 설명 중 하나를 빌려 살피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과달카날 레퀴엠>의 텔레비전 표면은 매체에 내재한 매개의 효과가 여전히 존재하고 이미지 문화가 막 주체화(subjectivity)와 결부되는 시대의 이미지에 속한다. 백남준이 <과달카날 레퀴엠>에서 정치적인/이데올로기적인 이미지 다발의 변형으로 실험한 것은, 주체가 기계 장치를 통해 세계의 표면으로 외화 되었다는 것과 관계한다.[14] 이는 주체의 내면이, 자본주의 세계의 물화 된 이미지, 자본의 기호로 전락한 이미지와 이들을 유통하는 기계적 속성과 맞닿으면서 일어난 일인데 시각적 미디어의 전면화는 점점 (스펙터클 사회, 시뮬라시옹 같은) 납작한 이미지를 무수히 복제하면서 세계를 중개한다. <과달카날 레퀴엠>의 프로젝션이 건축적인 것, 표면으로 확장되면서 드러내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적당한 환영주의와 계몽주의와 유토피아적 기술주의의 경향이 공존하는 해골 씬의 프로젝션은 미디어의 자연화가 가속화하는 정보 과잉의 시대에 적합한 납작하고 불투명한 정보의 흐름을 특징적으로 예견해 내고 있다.
결국 과잉 정보를 담은 텔레비전 영상이 모니터가 아닌 스크린/벽면에 건축적 표면으로서 영사될 때 그것은 변화하는 표면의 외양이 된다. 또한 영화적 관람 관습을 폐지하는 간헐적 점유(입구의 영상 보기를 그만두고 떠났다가 다시 입구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를 고려하면 그것은 오직 얇게 흐르는 정보의 표면으로서 작동하게 될 것이다. 그 같은 변화하는 정보의 표면은 건축의 매개변수로서 기능한다. 달리 생각해 보자면, 오늘 날 이 같은 경향을 대표하는 또 다른 모델이 서울 DDP를 설계한 자하 하디드 건축의 양식, 파라메트리시즘(Parametricism)의 디자인 양식이다. 파라메트리시즘은 현대 아방가르드 건축 양식 혹은 당대 테크놀로지가 도입된 수단으로, 모던 건축과 포스트 건축을 계승하면서 촉발되었다. 이 용어는 자하 하디디의 동료 패트릭 슈마허가 제안한 것으로, 파라메트릭(매개변수) 디자인에 기초하고 알고리즘을 통한 디자인 방법론을 전개해 왔다.[15] 주름진(folding) 물결 모양의 유기적인 비정형의 외형이 특징인데 그 같은 이미지가 형태 생성의 표면인지 하나의 클리셰인지는 논쟁의 영역이다. 적어도, (건축가가 ‘의도한’) 변수의 등식으로 제한된, 그러나 동시에 전통적 매체의 제약으로부터 확장된, (건축가의 손에서 벗어난) 컴퓨테이셔널 디자인으로 구현하는 파라메트리시즘은 구조를 뒤덮는 가변적인 표면의 이미지를 강조한다. 과잉 정보를 저장한, ‘건축적, 표면으로서’ 무빙 이미지는 일종의 시간적 주름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매개변수 디자인 건축과 통하는 지점이 있다. 저장되고 연산되어 넘쳐흐르는 정보의 형상으로서, 풍경과 형태를 생성하는 무빙 이미지.
그렇다면 건축적, 표면으로서 무빙 이미지는 건축적 장식이나 외양에 지나지 않는가. 오늘날 스크린은 건축적 구조에 들러붙어 정보가 교란되는 표면이 된다. 거기에서 이미지는 매개 변수로서의 정보이다. 데이비드 조슬릿은, 오늘날 이미지는 “감각적 정보 형태와 개념적 정보 형태가 결합”하여 유통된다고 주장한다.[16] 그 같은 건축적 표면에 넘쳐흐르는 정보가 유통되면서 주체 생성의 계기가 될 때, 보기의 감각은 서로 다른 무대에 올려질 수 있다. 한편에서는 이 건축적 부피와 용적률을 달리 구현하는 주름진 건축적, 표면의 이미지로부터 상호 작용의 보기가 가동한다. 디스플레이와 프로젝션의 이미지는 더 이상 벽화나 영화 보기의 경험을 되돌리지 않는다. 건축적, 표면으로서 무빙 이미지는 영화적 보기의 관습에 반하면서(누구든 언제든 스크린의 표면에서 시선을 돌릴 수 있다), 관객과 일대일 관계를 맺는다. 이를테면 포스트-포디즘 혹은 맞춤형 대량생산(mass customization)의 시대에 관객의 위치는 “느낌과 바라봄과 의미의 역설적인 구조”에 놓인다. “첫눈에는 도무지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다가 잠시 후에는 의미가 넘쳐” 흐르고, 밋밋하던 감정에 욕망이 불타오르기도 한다.[17] 그 같은 정보의 과잉 상태에서 강렬하고 적극적이며 성찰적인 순간이 생성되고, 매번 새로운 경험과 복수의 해석이 동시에 실현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로써 무빙 이미지는 백남준이 꿈꿔왔던 대로 건축적 표면에서 네트워크의 표면으로서 이동하면서 지각의 네트워킹을 끌어낼 수 있다. 다른 한편은 제2의 자연으로서 이미지 표면의 다발로 구축된 “스펙터클의 몰입 환경을 반복” 경험 하면서 그 밋밋하고 불투명한 정보를 슈퍼-플랫한 것으로 단순히 체험(“Erlebnis”)할 가능성이다. 가령, 스크린에서 퍼포먼스를 하는 샬럿 무어만의 얼굴은 낮은 해상도 탓에 뭉개져 있다. 그 ‘빈곤한’(poor) 얼굴은 과달카날에 남은 해골을 떠올리게 한다.[18] 그러나 그 같은 디테일을, ‘부풀린’ 스펙터클에서 경험하기는 어렵다. (박물관에서 흔히 제공하는 몰입 미감, 실감 영상을 통한, 시공간의 가상적 복원을 통한 체험은, 아우라를 재구성해 내지 못한다. 그것은 슈퍼-플랏의 체험일 것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건축적 표면으로서 무빙 이미지 또는 무빙 이미지라는 건축적 표면 사이의 거리를 또한 작품의 미적 형식과 디자인적 구조 사이를 진자 운동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건축적, 표면으로서 무빙 이미지는 건축에 잠재된 미래주의의 환영을 응축한다. 건축적, 표면 이미지를 경험(“Erfahrung”)할 수 있을 스크린 표면과의 접촉 조건 속에서 즉, “환희와 경멸, 관조와 오락, 거리와 몰입” 사이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은 바로 주체일 것이다.
문제는 이 뻔한 이야기가 매체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품고 있냐는 것일 것이다.[19] 백남준과 <과달카날 레퀴엠> 영사에 대한 에피소드는 너무 익숙해서 간과하기 쉬운 지점이 있는 것 같다. 이미지에서 정보 또는 데이터로 다시 ‘표면으로서, 건축적 스크린’으로 이동하면서, 탈물질화된 영역에서 재물질화 하면서, 남은 것은 더 이상 사회적 관습도 미학적 실천도 역사를 증언하는 이미지도 미학적 경험 나아가 시각성을 위한 것도 아닌, 이것들이 초과하며 뒤엉켜 흐르고 있는 어떤 텅 빈 매체의 감각일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대동아주의의 퇴폐를 암시하지도, 평화로운 지구촌에 대한 환호의 메세지를 전달(address)하지도 않는다. 모호한 몽타주로 흐르도록 구성한 그 지정학적 이미지가 지구화/‘세계만들기’의 무의식을 보여준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오늘날 그 ‘건축적, 표면으로서의’ 이미지는 어떤 단속적 환각(intermittent hallucination)으로만 기능하는 것 같다. 누구의 환각인가.
그 환각은 (스크린) 매체와 (건축적) 환경의 변증법에서 작동한다. 벤야민이 20세기 초 변화하는 지각 구조의 징후 속에서 예술(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화 몽타주)의 새로운 과제를 설정했듯이, ‘건축적, 표면으로서 이미지’는 동시대 예술이 당면하고 있는 새로운 과제를 암시한다. 벤야민은 영화와 건축물의 수용은 산만한 정신 상태에서 “촉각과 시각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이때 촉각적 수용은 정신 집중이 필요하지 않는 습관과 익숙함을 통해 기능하며 심지어 촉각적 지각이 시각적 수용을 규정하기도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관한 벤야민의 예언은 절반만 맞은 것 같다. 그가 예상치 못한 것은 광학 장치의 무의식이 장치의 연산(computation)으로 수렴하고 분기하면서, 쉼 없이 흐르는 과잉의 데이터 속에서 인간의 지각 기관이 촉각적 수용에 완전히 매몰될 때 또한 분산된 지각이 더 이상 시각적 수용을 (강도의 의미에서) 감각하지 않을 때 그 단속적 이미지는 더 이상 시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는 비/시각적 이미지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때, ‘건축적, 표면으로서’ 무빙 이미지는 장치에 기록(/저장)된 아카이브의 무의식이 드러내는 환각이자 연산 장치의 환각으로, 사이버네틱스라고 부를 수 있을 변화하는(/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보이기 시작한다.[20](어쩌면 이점이 기계적 감각을 실험한 <과달카날 레퀴엠>이 맥시멈 한 이유일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이 오늘날 ‘건축적, 표면으로서’ 이미지에 대해 새롭게 숙고해야 하는 이유다.
* 이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 지원 특별 기고로 게재되었습니다.
[1]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2), p.131; Erika Balsom, “Before the Cinematic Turn: Video Projection in the 1970s”(2015) in Video Theories: A Transdisciplinary Reader, ed. Dieter Daniels and Jan Thoben (New York: Bloomsbury, 2022), p.513.
[2] 아트센터의 파사드는 건축 설계 시 백남준의 실천을 반영한 잠재태로 형상화됐다. 건축구조가 외부의 풍경을 안팎에서 일종의 티브이처럼 ‘영사’하고 있고 불규칙적 가로 프레임과 규칙적인 세로 프레임 그리드 파사드는 일종의 주사선 같은 매체적 특성을 지시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같은 전시 도입은 건축물과 일종의 연속성이 부여된다.
[3] 백남준은 생전에 센터를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 되길 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경기문화재단 누리집. https://www.ggcf.kr/pages/NamJunePaikArtCenter. 24년 8월 30일 마지막 접속. 전시는 미술관의 소장품을 당대적으로 해석하면서, 오웰식의 전체주의적 장치로서 미디어를 향한 의심을 P2P의 실천으로 전환하려 했던 긍정주의가 오늘날 유효한 상태로 도래했는지 묻는다. 이 에너지는 다소 모호한 데가 있으나 이 글의 주제는 아니다.
[4] <과달카날 레퀴엠>은 백남준아트센터 누리집의 <비디오 아트 아카이브>에서 다시 볼 수 있다. https://njp.ggcf.kr/pages/videoarchive. 24년 8월 30일 마지막 접속.
[5] 장-루이 보드리가 지적하듯이, 날것 그대로의 질료로서 ‘객관적 현실’과 그것이 기입된, 또한 그것을 달리 엮어 영사하는 영화 사이에는 단절과 분리가 있다. 즉, “완성된 작품만을 보고서는 중간에 이루어진 변형을 구분할 수 없다.” 만약, 그 같은 변형이 중요하지 않게 된다면, 적어도 미디어가 건축적 표면에 덧입혀질 때 현실과 기입된 것 사이에는 어떤 단절과 분리도 중요치 않게 된다. 장-루이 보드리, 기본적 영화 장치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적 효과(1970), 『사유 속의 영화』, 이윤영 엮음 (문학과지성사, 2011), p.268
[6] https://www.moma.org/collection/works/163792. 24년 8월 30일 마지막 접속.
[7] 크레딧에는 샬럿 무어만이 인터뷰어로 내레이터로 영상을 주도하고 빌 비올라가 일부 촬영한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8] 매체와 전쟁 기계의 관계에서 기술의 혁신에 관한 문제는 폴 비릴리오의 『전쟁과 영화』, 권혜원 옮김 (한나래, 2004)를, “괴롭혀진 이미지”의 의미에 대해서는 할 포스터, 『첫 번째 팝 아트 시대』, 조주현 옮김 (워크룸, 2021), p.151~200을 참조.
[9] <과달카날 레퀴엠>(1977)에 실린 이 인터뷰는 1979년 재편집본에서는 삭제되었다.
[10] 잠재성(virtuality)의 의미에 대해서는 엘리자베스 그로스, 『건축, 그 바깥에서』, 탈경계인문학연구단 공간팀 옮김 (그린비, 2012), p.9를 참조.
[11] 할 포스터, 같은 책, p.15.
[12] 인용은 발라드가 작성한 소설 『크래시』(1974)의 프랑스어판의 서문에서 가져왔다. 프랑스어판은 제목을 ‘느낌표’의 효과를 넣어 『Crash!』로 번역하고 있다. http://www.jgballard.ca/media/1974_november_foundation_the_review_of_science_fiction.html. 24년 8월 30일 마지막 접속.
[13] 할 포스터, p.14. 번역은 영어본을 참고하여 수정했다. 영어본, p.6.
[14] 스웨덴 출신의 큐레이터 퐁튀스 홀텐(Pontus Hulten)은 일찍이 1968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기계 장치에 관한 전시 <기계 시대 말에 보인 기계장치>를 기획하면서 영화를 시각 매체로서 간주하고 회화와 조각, 자동차 등과 나란히 전시했다 그는 주체의 감각을 매개하는 방편으로서 문화 기술에 주목했다. “카메라를 다소의 사진과 필름과 더불어 선정한 까닭은 그것이 그림/화면을 만드는(picture-making), 기계-화학적 장치이기 때문인데, 상당 부분 우리가 보는 방법에 기초를 제공하고 그 점에서 특히 미술전시에 적합하다” (강조는 필자). https://www.moma.org/momaorg/shared/pdfs/docs/press_archives/4149/releases/MOMA_1968_July-December_0081.pdf, p.2. 2024년 8월 15일 마지막 접속.
[15] https://www.architectsjournal.co.uk/practice/culture/patrik-schumacher-on-parametricism-let-the-style-wars-begin. 24년 8월 30일 마지막 접속.
[16] 데이비드 조슬릿, 같은 책, p.12
[17] 할 포스터, 같은 책, p.17.
[18] 빈곤한 이미지에 대해서는, 히토 슈타이얼, 『스크린의 추방자들』, 김실비 옮김 (위크룸, 2018), p.41~49을 참조. ‘빈곤한 이미지’에 관한 슈타이얼의 주장에는 가속주의의 난센스가 드리워 있는 것 같다. ‘건축적, 표면 이미지’ 또한 그 같을 수 있다.
[19] 지금까지의 얘기는 이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상투적인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다만, 매클루언의 낙관주의가 배양한 지구촌을 그리면서 백남준은 이후 체계-환경의 변증법적 연속성의 첫 지점을 통과하고 있고, 백남준아트센터(와 2024년 <굿모닝 오웰>의 40주년 기념 전시)의 건축술은 이 같은 증후/징후를 선명하게 맥락화 한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지금/여기 도래해 있는 변형과 매개된 경험을 다루기 위해서 이 연속성을 가시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20] 모두가 지적했듯이, 이 같은 환경을 시각적으로 가장 선명하게 선구적으로 예언해 낸 경우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고전 ⟪비디오드롬⟫(1983)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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