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미래대, 그리고 사라진 사과
경산에 코발트 광산이 있다. 한때는 이 공간을 언급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누군가는 이 이야기에 “아이고 말 다 못 합니다”(대구매일 1960년 5월 22일) 하며 손사래를 치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 사회는 레드 컴플렉스가 깊게 박혀 있었고, 학살 피해자들은 보도연맹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 공간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긴 시간이 흐른 뒤, 때가 찾아온 것은 2001년 어느 날이었다.
직접적인 계기는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제작이었다. 1999년부터 2005년까지 매주 일요일 밤 11시 30분 방영했던 프로그램은 한국 사회에서 가려졌던 일련의 사건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제주 4.3’, ‘노근리 사건’, ‘동백림 사건’, ‘실미도 사건’ 등이 이 방송을 통해 주목받았다. 2001년 프로그램 제작진은 보도연맹을 취재하기 위해 경산 코발트 광산을 방문했다. 보도연맹 특집 제작이 결정되자 유족회와 시민 단체가 함께 대책위를 구성했으며, 이를 계기로 1차 발굴이 시작됐다.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이에 따르면 갱도의 입구는 두께 1미터 이상의 콘크리트 벽으로 막혀 있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때 광산의 지하수를 막아 농업용수로 쓰기 위해 주민들이 설치한 벽이었다. 경산은 새마을운동 이전부터 새마을 만들기 사업을 전개했다고 알려져 있다. 새마을은 곧 농촌의 근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20여 년간 다른 용도를 위해 막혀 있었던 벽은, 다이너마이트를 동원하고 나서야 뚫릴 수 있었다. 그렇게, 코발트 광산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코발트 광산 괴담의 탄생
당시 한국은 하나로통신(현 SK브로드밴드)이 내세운 최대 8Mbps의 ADSL 통신, 이른바 초고속 인터넷의 광풍이 불고 있었다. 가수 유승준이 ADSL의 광고 모델을 맡았고, ‘개죽이’와 ‘아햏햏’으로 표상되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초고속 인터넷 시대에 이르러 다시 나타난 코발트 광산. 이를 주목한 것은 인터넷 커뮤니티였다. 익명성이 보장된 인터넷 공간은 이야기를 만들어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에 최적화돼 있었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퍼져 나갔다. 당시는 또한 영화 ‘주온’과 ‘여고괴담’이 컬트적 인기를 끌고 있었다. 공포물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다양한 인터넷 커뮤니티 괴담을 생산해 냈다. 약간의 현실적 요소만 있으면 괴담은 그럴듯해졌으며, 책임이 부재한 인터넷 공간에서 익명화되어 빠르게 소비됐다.
여기에서 당시 인터넷의 주 사용자층이 10~20대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만하다. 2001년은 뉴스에서 연일 음란, 자살, 폭탄 사이트에 대해 경고하고 서울 시내 초·중·고교에서 정보통신 윤리교육을 강화하고 나선 시기였다. 그해 정보통신부는 음란, 자살, 폭탄 사이트와 전쟁을 선포했다. 당시 통계청과 정통부는 10~20대 인터넷 이용률이 80%를 넘어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웹 페이지 ‘디지털경산문화대전’은 현재 경산의 지역적 특징 중 하나로 교육도시의 면모를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 따르면 경산은 “이름난 교육·학원 도시”이며 “대학이 들어서면서 대학촌 중심의 새 상권이 형성되고 청년문화의 유입만 아니라 정치 성향의 변화까지 촉진되어 그 면모와 분위기가 크게 바뀐” 도시였다. 당시 경산 소재 대학 수만 해도 13곳(폐교 3곳 포함)이었다. ‘학원도시’인 ‘경산’에서 ‘유해 사이트’에 노출된 ‘10~20대 인구’가 많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경산 코발트 광산 괴담의 역사적 상흔이 ‘인터넷 3대 괴담’으로 소비될 수 있었던 이유를 (감히) 추정해 볼 수 있다.
경산 코발트 광산의 사건은 ‘대구 안경공장 괴담’으로 이어졌다. 이 괴담은 “1960년대 초 섬유공장이 운영됐으며, 알 수 없는 화재의 연속으로 사장이 자살”했으며, “이후 구두공장이 들어섰으나 이 또한 알 수 없는 화재와 악재”가 이어졌고, “마지막으로 들어선 안경공장에서는 사장이 귀신에 씌어 기숙사에 불을 질러 취침 중이던 직원 22명을 숨지게 하고 자살”했다는 내용이었다. 누군가는 빙의를 체험할 확률이 한국의 흉가 중 가장 높다고 했으며, 행여나 호기심에라도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대구미래대 스타일리스트과 학생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라며 “학교 근처 안경공장에 한 선배가 술을 먹고 들어갔다가 귀신에 씌어서 완전히 미쳐버렸다”라고 말했다. 대부분 대구 소재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이 술자리에서 선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호기롭게 갔다가 화를 입는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괴담이 공포를 자극하기 위해서는 현실성이 담보돼야 한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안경공장 괴담에는 2개의 대학교가 자주 언급됐다. 먼저 코발트 광산에서 불과 1.8km 남짓 떨어져 있는 대구한의대(구 경산대)가 있다. 다른 하나는 경산시 평산동 270번지, 지금은 미래로 114라는 도로명 주소로만 남아 있는 대구미래대(구 경북실업전문대)다. 대구미래대는 광산으로부터 약 2.9km 떨어져 자전거로 15분 안팎에 도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두 학교는 안경공장 괴담에 현실성을 불어넣는 요소였다.
삼풍백화점 참사와 도시전설의 관계를 분석한 염원희[1]에 따르면, 괴담은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과거 사건의 참혹함을 지속적으로 환기한다. 또 사건을 경험하지 못한 후대에는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던 과거의 사건을 인지하고 기억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안경공장 괴담이 대부분 ‘귀신에 씐다’는 결말로 이어졌던 까닭도, 이곳에서 말로 하기 힘든 사건이 벌어졌음을, 숨진 수천 명의 희생자 원혼이 아직 승천하지 못하고 이승을 떠돌고 있음을, 다시 말해 희생자를 정식으로 기리지 않았다는 현실적 문제가 남아있음을 반영한다.
안경공장 괴담은 2021년 MBC 프로그램 <심야괴담회>를 통해 다시 한번 주목받았다. 이 프로그램은 안경공장 괴담을 소개하며 실제 당사자가 직접 제보를 해왔다고 설명했다. 당사자의 인터뷰를 통해 ‘현실성’을 부여했다. 익명의 경험이었던 괴담은 실제 당사자의 소름 끼치는 체험담으로 변모했다. 해당 영상이 게재된 뒤 네티즌들은 “실제로 귀신 봤다는 사람들 꽤 있다”, “부모님이 근처에는 절대 가지 말라고 했다”, “대구 사람인데 어릴 때 호기심에 자주 갔었다” 등 각자 체험담을 댓글로 언급하며 살을 붙여나갔다. 인터넷 댓글에 유효기간이 없듯이, 괴담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괴담과 대구미래대, 그리고 폐교
괴담이 흔적으로 잔존하다 다시 주목받고 영향력을 복권하는 동안, 괴담에 현실성을 부여한 소재였던 대구미래대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2018년 2월, 첫 번째 자진 폐교 사례라는 오명과 함께. 지역 네티즌들이 “미래가 없는 미래대”라고 표현할 정도로 대구미래대의 내실은 형편없었다. 2012년부터 2015년까지 4년 연속 부실대학으로 선정됐으며, 2015년 대한구조개혁평가에서 E등급을 받으며 사실상 교육 기관으로서 기능을 상실했다. 결국 2016년 학교를 소유한 애광학원은 대구대와의 통폐합 및 폐교를 추진했다. 학내 구성원에게 알리지 않고 ‘몰래’ 추진한 폐교였다. 한 교수는 “학교 정상화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폐교를 추진한다고 하니 정말 황당하다”(매일신문 2017년 1월 20일)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2017년 교육부의 재정 지원이 전면 제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대구미래대의 폐교가 확정됐다.
대구미래대를 두고 무언가를 파묻고 설립하고 신설하고 매립하는 행위가 반복됐다. 학교가 폐교한 뒤, 경산시는 해당 부지를 73억 원에 매입해 청소년수련관을 건립하고 공연장과 상담 센터, 풋살장, 체육활동장 등 다양한 시설을 짓겠다고 밝혔다. 총사업비는 221억 원 규모이며, 경산시는 4만 4,000여 명의 청소년 인구를 위해 만드는 시설이라고 설명했다. 최영조 시장은 “청소년이 희망을 품고 행복한 경산시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으며, 안전하고 튼튼하게 완공하여 지역 내 청소년들이 다양한 문화 활동을 경험하고 미래사회의 필요한 역량을 갖출 수 있는 활동의 장으로 만들겠다”라고 밝혔다. 경산시는 146억 원을 투자해 육아종합지원센터도 건립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착공을 시작한 지난해 3월, 대구미래대 부지에 10만 톤 이상의 불법 폐기물이 매립돼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50cm가량을 파내자 폐콘크리트와 폐아스콘, 폐토석이 쏟아져 나왔다. 학교를 짓는 과정에서 파묻은 것들이었다. 폐기물의 처리 문제와 청소년수련관 및 육아종합지원센터의 건립 사업 존폐를 두고 경산시와 애광학원, 교육청이 이견을 드러냈다. 복지 문화 복합공간을 기대했던 시민들은 상실감을 느꼈고, 경산시는 애광학원을 상대로 100억 원 규모의 소송을 제기했다.
대구미래대가 남긴 진짜 유산은 따로 있다. 바로 신도시 건설이다. 1995년 경산은 4만 명에 이르는 학생이 머물 정도로 큰 학원 도시였다.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신시가지 조성 사업이 계획됐으며, 당시 경북실업전문대였던 대구미래대 인근이 대상지로 낙점됐다. 이는 사동지구 택지개발 조성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수년간 계속됐다. 아파트 3,8903,890 가구와 단독주택 366366 가구를 짓겠다는 건설 계획을 위해 각종 건설 장비들이 동원됐다. 코발트 광산의 콘크리트 벽이 폭파되기까지, 이 지역은 주거 시설, 시립박물관 등의 문화 시설, 근린공원 같은 여가 시설을 건설하는 공사가 일사불란하게 진행됐다. 1997년 7월 4일 <매일경제>는 활기를 띤 택지 지구의 분양 상황을 보도하며, 접수 시작 첫날 217개 필지에 250여 명이 몰렸다고 전했다.
대구미래대는 ‘대구 안경공장 괴담’을 촉발한 소재이자, 신도시 건설을 이룬 조건이었다. 땅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고 말한다면, 괴담과 신도시의 ‘생성’에도 ‘소멸’이 뒤따른다. 이제 대구미래대가 폐교하면서 하루아침에 모교를 ‘잃은’ 264명의 행방을 살펴볼 차례다. 당시 언론은 첫 자진 폐교 사례로 대구미래대를 조명하면서, 갈 곳을 잃은 재적생 264명의 구체적인 숫자를 강조했다. 이 외에도 E등급, 신입생 충원율 34.8% 등 학교의 상태를 가늠케 하는 수치들이 언급됐다. 집계된 264명의 재학생과 휴학생은 교육부의 특별 편입학 대상에 올라 대구·경북지역, 동일·유사 학과 편입학을 원칙으로 인근 대학에 편입학할 수 있었다. 이들의 향후 선택보다는 부실대학이 책임지지 못한 264명이라는 키워드가 강조됐으므로, 학생들이 어느 대학에 편입학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이들에 대한 기사 역시 자취를 감췄다.
사라진 특산물
과거에는 있었으나 지금 경산에는 없는 또 다른 ‘소멸’이 있다. 주민들이 두꺼운 콘크리트 벽을 세워 코발트 광산의 흔적을 소거하고 유용한 자원인 물로 치환하고자 했던 직접적인 요인, 바로 특산물이다. 특산물은 마치 고장의 오랜 문화유산의 위상을 얻기 마련이며 지자체는 발 벗고 나서서 특산물을 앞세운 축제를 벌인다. 경산은 오래전, 그러니까 30년 이상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드넓은 사과밭이 자리 잡고 있었던 사과의 도시였다.
1983년 출판사 뿌리깊은나무가 발간한 『한국의 발견-경상북도』 편은 경산을 “사과꽃 향기와 공장 연기”로 소개한다. 당시 저자의 눈에는 경산을 가로지르는 국도에서 대구에서 떠밀려 온 공업 단지와 사과 농사의 풍경이 번갈아 펼쳐졌다. 경산은 “나라 안에서 사과를 가장 많이 생산해 온 모래흙으로 이루어진 땅”이었다. 이 ‘모래흙’은 대구와 경산을 타고 흐르는 금호강·낙동강 변의 모래를 일컫는다. 경산의 모래흙은 어떤 연유로 “사과를 가장 많이 생산”해 내는 땅이 될 수 있었을까.
대구·경산 지역의 사과 재배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9년 초대 동산병원장이었던 미국인 우드브리지 존슨이 심은 72그루의 서양사과나무가 대구·경산 사과의 유래로 알려져 있다. 존슨은 미국 미주리주에서 사과 묘목을 들여와 선교사 사택 정원에 심었다. 묘목은 잘 성장했지만, 토질 문제로 사과를 상업화할 수는 없었다. 모래의 열매(沙果)라는 이름 그대로 사과 재배에는 모래와 자갈이 중요하기 때문이었다(씹는 식감이 모래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낙동강·금호강변의 모래땅이 사과 재배에 최적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것은, 당시 낙동강을 화물 수송로로 사용했던 일본인들이었다. 1904년 사업가 가게야마 히데키(影山秀樹)가 상업적 목적으로 처음 과수원을 조성했지만, 당시만 해도 사과 재배는 실험의 영역이었다. 실험이 끝나고 지역의 모래흙이 사과 재배에 적합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과원 취락이 생겨났다. 그렇게 사과는 지역 대표 특산물이 되어갔다.
사과 재배는 가지치기부터 농약을 뿌리는 일부터 열매가 맺기 시작할 때 솎아내고 봉지를 씌우는 일까지 많은 노동이 필요하다. 『한국의 발견-경상북도』가 제작될 당시에도 경산의 사과 농사는 위기를 겪고 있었다. 많은 나무가 부란병으로 죽어가고 다른 지역에서 재배되는 일본산 품종 부사가 사람들의 입맛을 자극하면서 경산의 홍옥도 인기를 잃어갔다. 기후가 바뀌면서 재배 적지가 청송과 영주로 옮겨간 것도 원인 중 하나였다. 1968년 4만 5천 톤에 이르던 경산의 사과 수확량은 1979년 3만 4천 톤으로 급격히 줄었다. 사과나무를 베고 포도나무를 심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현재 경산의 대표 특산물은 포도, 복숭아, 대추가 됐다. 남천 맥반석 포도축제와 경산대추축제가 매년 열리고 있으며, 경산역 앞에는 대추 옹골빵이 명물로서 판매되고 있다. 경산 대추는 1980년 사과를 재배하던 압량면 금구리의 농민 강대용이 경남 밀양에서 묘목을 구해와 재배한 것이 시작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경산의 사과밭은 점차 대추밭과 포도밭으로 대체되어 갔다.
이제 다시 경산 코발트 광산으로 돌아와 본다. 대구미래대가 사라지고 사과밭이 자취를 감출 때, 코발트 광산의 콘크리트 벽은 폭파되고 뚫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괴담으로 소비되던 사건의 실상이 알려지고 2차, 3차 발굴이 진행됐다. 제2 수평굴 주변은 정리되고 위령탑이 세워졌다. 하지만 광산 내부에 여전히 포댓자루가 쌓여있으며, 수습된 유해는 이제 안치돼야 한다. 괴담과 역사를 구분하고 정리해야 하며 언젠가 세워질 청소년수련관을 위해 대구미래대 부지의 폐기물을 처리해야 한다.
도농복합 기능도시이자 학원도시, 대구의 위성도시 등 다양한 성격으로 소개되는 경산, 정치적으로는 ‘대구·경북’으로 묶여있으나 보도연맹 학살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는 경산. ‘생성’과 ‘소멸’은 반복되고 있으며,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1] 염원희, 「사회적 참사 소재 도시전설의 유형과 의미:<삼풍백화점 괴담>을 중심으로」, 『한국민속학』 (제63호, 2016), pp.8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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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시가 73억에 산 땅 팠더니 불법 폐기물 수십만톤」, 『매일신문』(2023년 1월 9일).
「경산시청소년수련관 건립공사 본격화로 2023년 8월 준공예정」, 『경산자치신문』(2023년 3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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