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연×엄제현의 티티카카 [2]정체성, 인간

조재연, 엄제현

LGBTQ+

엄제현(이하 U): 두 번째 토크가 밝았습니다. 오늘 역사에 남을 준비되셨나요?

조재연(이하 C): 감당할 수 있다.

U 오케이 땡큐입니다. 정체성으로 묶인 키워드는 크게 끌리지 않는 낱말들이 많았어요. 인간도 그렇고. 그래서 오늘은 두 챕터를 한꺼번에 다루려고 합니다. 정체성부터 하죠. LGBTQ+가 머리네요. 먼저 한 번 느끼는 바를 말해주시죠.

C 왜 맨날 제가 먼저에요.

ㅋㅋㅋ제가 호스트고 당신이 게스트니까 그렇죠.

C LGBTQ+ 정체성을 지닌 작가의 작품이 새로운 미학, 감각을 저절로 담보할 것이라는 시각은 철 지난 이야기지 싶어요. 외려 최근 우리에게 주어진 건, 그들의 작업물을 이제껏 우리한테 없던 시각으로 새롭게 바라봐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 내지 필터링 아닐까요? 억압된 소수자이기 때문에 소수자적 맥락으로만 환원시키는 해석 또한 편견일 수 있어요. 작품이란 입체적일 때 그 이야기가 깊어진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선 넓은 해석이 불가능해요. 제게 가장 인상 깊었던 작가는 이강승이었어요. 그의 작업은 LGBTQ+ 이미지가 새롭게 출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요. LGBTQ의 출현이 아니라 ‘발굴’이죠. 우리는 몰랐지만 일상을 함께해 왔던 LGBTQ의 역사요. 그의 아카이브와 리서치를 통해 확인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LGBTQ+ 없이 한시도 산 적이 없었다는 거에요. 무색무취에 가까웠던 노멀의 세계를 LGBTQ+라는 필터를 통해 새롭게 감각하게 만드는 방식이 미학적인 성취란 생각이 들었어요.

U 음! LGBTQ+ 같은 것들도 역사적으로 발명된 범주고, 범주화는 다발들을 묶어 수면 위로 길어 올려서 무대화하는 일이죠. 특정 범주를 역사화한다는 일은 과거를 재구성하면서 시간을 생산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한때는 LGBTQ+를 역사화하고, 그들이 마주하게 되는 세계가 어떤지 보여주는 작업들이 유효했던 때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당신 말대로 요즘은 정체성이 상품과 너무나도 유기적으로 결합해서 셀 수 없는 정체성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선지 퀴어적인 것이 시의적인, 전장의 최전선인 느낌은 아니에요. 솔직히 바깥은 몰라도 미술계에선 LGBTQ+ 좀 쿨하지 않아요? 쿨해진 지 좀 됐죠. 커밍아웃에 이르기까지의 고된 시간들. 청소년의 가치관 수립기에 일어나는 번뇌들은 응당 부정하기 힘든 고통 속에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예술계 필드만 전체로 놓고 본다면 퀴어가 많은 토큰을 쥐고 있는 것도 사실이죠. 그리고 전 다음 생엔 퀴어로 태어나고 싶기도 해요. 이런 말, 해도 되는 거지?

C 역사에 오래 남겠다.

U ㅋㅋㅋㅋ 제가 이정도 말도 못한다면 퀴어가 바꿔 온 시각을 외려 무화하는거죠. 이런 발언이 가능한 상황이야말로 퀴어 투쟁의 산물이에요. 이성애자는 한 번 겪어봤으니 같은 삶을 반복하고 싶진 않죠. 퀴어로서 인생을 시작한다는 게 어린 시절을 좀 더 치열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못 겪어봤으니 실상 허구라고 해도 이런 선망이 가능하죠. 전 늘 불행만이 현실을 감각하게 해준다고 생각해 왔어요. 그렇지만 어려서는 주어진 인생을 의심해 보는 일이 없었고, 인생을 시작하는 게 늦어졌어요. 퀴어라면 청소년기부터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하고 스스로에 대한 고민을 빨리 시작하는 것 같거든요. 아무튼. 자네 말대로 사이비민족주의나 개성, 정체성마저 간단히 주조하기 때문에 눈을 가늘게 뜨게 되죠. +에 주목해 본다면, 그건 정체성에 대한 무한하게 열린 긍정이라서 한없이 꼬리를 물 수 있어요. 있다고 말하면 그냥 긍정되는 거에요. Q 다음은 I, I 다음은 A, A 다음은 P… 성이라는 게 누구에게나 개별성을 약속하는 코드의 역학으로 작동하지, 헤테로 남성, 시스젠더 여성이라고 차별적으로 기능하진 않잖아요. 당연히 성에 있어서는 누구나 개별적인 정체성을 갖죠. 섹슈얼리티와 헤테로 규범은 구분해야죠. 퀴어 조각, 퀴어 회화, 이런 건 동의 못하는 카테고리에요. 조각에 퀴어 한 스푼 넣으면 새로운 감각이나 사조를 약속하는 건 아니잖아요. 어우, 이거 몇 문장만 훔쳐가서 모함하면 싸불당하기 딱 좋은데. 몇 번 당했는데.

C 정체성 담론은 두 가지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첫 번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방식인데, 소수자성의 차이를 강조하는 거죠. 노멀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비정상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소수자는 경험적으로 그 사회의 모순과 불화해요. 소수자가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선 사회를 바꿔야 하기 때문에 진보적 의제와 필연적으로 결합하기도 하고요. 자본주의가 노동력 재생산과 복지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기 위해 만든 가족 제도나, 남성 중심주의, 이성 중심주의 같은 주류적 시스템과 끊임없이 부딪칠 수밖에 없어요. 이러한 측면에서 소수자가 지닌 차이가 새로운 미학과 감각으로 이어진 사례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정체성 미술이죠. 반대로 두 번째는 소수자성의 차이를 외면하는 방향이에요. 모더니즘적 방식이라고 얘기할 수 있죠. 평등은 모두가 다를 때 구성되는 게 아니라 같을 때 이룩할 수 있는 어떤 ‘상태’에요. 모두가 다 다른데 어떻게 평등해요? 차이를 강조하는 게 아니라 차이를 외면하고, ‘이렇게 다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아’라고 말하는 게 평등이라고요. 이 방향에선 이들은 소수자가 겪는 문제가 소수자만의 문제가 아닌 것을 강조해요. 아까 얘기한 가족 제도, 남성 중심주의, 이성 중심주의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문제는 소수자만 겪는 모순이 아니다. ‘그런 모순의 영향 아래 있는 한 우리는 모두 소수자다’라고 외치는 거죠. 마치 ‘우리는 모두 흑인이다’라는 슬로건처럼요. 이강승의 작업이 좋은 이유는 후자의 방법을 따르기 때문이에요.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소수자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소수자가 아닌 사람들의 이해를 배제시키는 측면이 있어요. ‘나’는 소수자의 차이 앞에서 영원히 닿을 수 없는 타인일 뿐이에요. 근데 모더니즘의 방식은, 이강승은 나를 LGBTQ+ 문제의 당사자로 만들어요. 소수자의 문제는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니까요. 그런 차원에서 급진적인 정치성을 지녀요.

U 이런 식으로 평등을 논하는 일에 대해 누군가는 모더니티 구식이라고 생각하는데, 정작 그럴 때 그들은 은밀하게 선형적 시간선을 숭배하는 것 같아요. 한편, 역사에 오래 남겠다고 했을 때, 우리 모두 헤테로 남성으로서 어떤 위기감을 감지하기에 감응하는 말이죠. 니가 뭘 알아 식의, 퀴어만이 퀴어 얘기를 잘할 수 있어 식의 당사자성 말이에요. 이건 단순히 퀴어에 국한된 현상은 아닌 것 같아요. 소수 정치인이 공동체 전체의 의지를 대표할 수 있다던 대의민주제에 대한 불신과도 동일한 맥락이에요. 솔직히 타당해요. 퀴어 전시면 토크할 때나 글을 받을 때 퀴어 비평가를 불러야겠죠. 그래서 위험해요. 당신이 너무너무 훌륭한 글을 쓴 적 있죠. 문장까지 기억합니다. “오랜 동안 윤리는 현자의 돌을 찾아왔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냈으니 그것은 바로 폭력이다.” 그리고 이제는 이렇게도 바꿔 말할 수 있겠어요. 오랜 동안 당사자성은 현자의 돌을 찾아왔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냈으니 그것은 바로 혐오다. 우리가 응당 제기할 수 있는 물음이 어떤 소수자를 건드려서 기분을 상하게 하면 혐오에요. 그럼 이제 우린 죄인이고, 그가 용서할 때까지 기약 없이 빌어야 하는 처벌 기계가 최신형이에요. 법보다 훨씬 후지죠. 우리 모두가 소수자라는 주장은 성립이 안 된다는 듯이 굴어요. 아니, 모두가 소수자니까 어떤 소수자를 상처 줄 지 모르니 사려야 하죠. 당사자성의 세계엔 당사자만 존재하고, 당사자의 이야기만 들으려 해요. 그와 같은 견해와 이견을 주고받을 타자는 이미 혐오로 찍혀 처분됐어요. 따지고 보면 LGBTQ+는 또 대단히 주류적인 프레임이기도 해요. 어디부터가 소수자고 어디부터가 주류인지는 스케일과 프레임의 문제지 영원불멸의 보더라인이 아니잖아요. 퀴어로서 자기 정체성을 작업 안에서 녹여내는 일이 주류 미술사 안에서 얼마나 용인이 잘 돼요? 근데 장애 예술은 안 그렇거든요. 장애 예술이야말로 진짜 분파주의적이고, 그냥 그가 가지고 있는 장애랑 즉자적으로 매치돼서 고립적으로만 이해되는 함정을 갖고 있어요. 보편적인 미술사 안에서 그 같은 실천이 어떤 의미고 담론적 기능을 갖는지 연결이 안 된단 말이에요. 거기 비하면 LGBTQ+는 미술사를 일부 접수했고 배석을 받았죠. 근데 장애는 또 역설적으로 개성적일 수가 없거든요? 늙으면 누구나 장애가 생기잖아요. 게다가 미술사는 장애 예술로 분파화하면 성립이 안 돼요. 그러니까 장애 예술 같은 방식으로 구분을 짓고, 그걸 개별적인 거라고 몰아붙이는 일 자체가 이 세상의 넌센스에요. 정상적 신체라는 허구와 압력을 바탕으로 작동하죠.

C  저는 ‘차이’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하는 바디우의 말에 동의해요. 어떠한 구체적 상황도 ‘타자의 인정’으로 해명될 순 없어요. 말씀드렸듯 모든 게 다 다르다고. 키, 생김새, 입맛, 말투, 경험, MBTI까지. 소수자가 아니더라도 나와 다른 어떤 누구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니까요. 소수자가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는 이성 중심주의가 됐든, 자본주의가 됐든 어떤 정상성을 강제해 온 정치의 문제에요. 근데 그 정치의 문제를 쏙 빼놓고 그냥 정상성 외에 다른 차이가 존재하는 걸 인정하면 된다고요? 결국 그게 존중의 문제였다고요? 그게 ‘취존’ 이른바 취향존중의 어법이랑 뭐가 달라요? 너(나)의 취향을 존중한다(해줘)라고 말해놓고 사실은 무관심한, 어떤 논쟁도 차단하는. 소수자의 인정은 당사자성이 아니라, ‘모두’라는 주체를 관통하는 정치에서 매개되어야 해요. 정치라는 매개를 통해서 당사자의 문제뿐 아니라 모두에게 걸린 문제로 재맥락화할 때, 그러니까 소수자의 정치가 시작될 때 변화는 가능해요.

U 저도 요번에 장애예술창작센터에서 청탁을 받았을 때 내가 이런 거를 받을 자격이 되나 하는 생각 많았어요. 당사자성에 입각한다면 신뢰의 문제가 곧바로 따라오죠. 부정적인 얘기를 했다가는 워싱 안 된 인간으로 낙인찍힐 것 같고, 씬에서 퇴출당할 것 같은 직감을 달고 살아야 한다는 측면에서 좋기도 나쁘기도 해요. 사실 모르면 가르쳐 주면 되고, 실수할 수도 있는 건데 이젠 용납이 안 되죠. 내가 뭐 발언했어. 근데 그게 되게 결례되는 발언이었어. 그럼 사과하고, 성찰하고, 학습해서 달라진 모습을 보여줄 기회가 주어질 사회여야 하는데 그렇질 않아요. 그런 발언 한 번 하면 그냥 차단이야. 과거는 사라지지 않고 객관적인 절차도 없기 때문에 영원히 징벌을 받아야 돼. 내가 어떤 발언했다가 만약 나중에 찐으로 반성했어. 그래도 영원히 밴이에요. 너 옛날에 그랬잖아. 이거야말로 인간 경시에요. 너 말고도 그런 말 할 수 있는 사람 많다는 거죠. 그러니 미술계가 섬뜩하죠. 캔슬 컬쳐로 충만하니까. 그리고 비평가도 소수자 아니에요? 저는 전시 기획 몇 번 해보니 계속하면 이 살벌한 재능으로 국현 관장도 하겠지만 저랑 잘 안 맞더라고요.

C  비평가가 소수자라?

U 완전 노부나가 앞의 사루(히데요시)죠. 요즘 기금 제도 안에서 작가가 비평 좀 받고 싶다? 전시 굴리고 남은 돈으로 비평가 할당해서 글 사오죠. 인격적으로 이미 미팅했는데 그게 협업처럼 여겨지지 가치 평가를 해달라고 누구도 생각 안 하잖아요. 전 진지빨고 가치평가했다가 피본 적 많아요. 넌씨눈이었죠. 비평가들도 비평을 작가의 악세서리로 만드는데 가담하고 있어요. 비평? 작가 커리어 인정. 이제 모두의 잘못이죠. 비평가로 스스로 떳떳할 인간이 몇 안남았어요. 그 돈을 피하기 어려운 비평가들 잘못이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밖에 지면과 발언을 내주지 못하는 제도의 잘못이기도 하죠. 제게 복안이 있어요. 비평가를 공무원으로 채용해서 아르코에서 완전 고용하고 관리하면 돼요. 비평가들 월 200씩 주면서 관리하세요. 대신 자율성을 보장하고 월 5개씩 토하라고 채찍 휘두르는 거에요. 5개 너무 많아요? 그럼 2개만 해요. 대신 좋은 거, 안 좋은 거 다 써야 되는 거야. 맨날 좋은 거만 못써. 그럼 니 비평가 퇴출. 3년 꿇고 재시험쳐서 들어와. 그다음에 작가들한테 돈 받고 글 쓰는 일 없애야 돼요. 그래서 아르코기록원에 공적 기록으로만 비평이 존재하도록 해. 아니면 온리 아마추어 비평만 쓰던가 나처럼 사재 털어서 웹진 하세요. 개인 간 거래비평? 발견되는 순간 십자포화 날려서 씨를 말려야 돼요.

C  강철의 연금술사의 국가 연금술사 제도가 떠오르는데?

그렇게 할 거 아니면 저희 퐁에다가 더 많은 지원을 해야죠. 얼마 전에 알죠? 아르코에서 갑자기 현안 이슈를 다룬다더니 정작 방법론은 담론 활성화를 위한 비평 생산이래. 그래서 제가 전화해서 “뭔 소리냐, 앞뒤가 안 맞는다” 했더니 “비평을 게재할 거”라 하길래 “옛날에 <웹진 아르코> 말아먹어 놓고 무슨 경우냐, 어디까지 참견하실 참이냐. 목적 없이 운영하지 마시라고, 그냥 예산 뜯어먹기 아니냐”고 제가 개지랄했어요. 결국 비평은 안 싣게 되었고요. 아. 갑자기 흥분했네요 또. 비평 같은 아름다운 주제를 얘기하다 보니까.

C 제가 소수자하고 타자를 엄격하게 나눌 수 있는 어떤 기준을 제가 제시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저한테는 비평가는 어떤 소수자라기보다는 타자에 더 가까운 존재였거든요. 비평가가 작가나 큐레이터에 비해 수적으로 소수이기도 하고, 또 비평이라는 행위가 그 자체로 정체성, 직업으로 연결되기보다는, 기획자나 작가가 순간순간 좀 경유해 가는 일종의 한시적 업무에 가깝게 존재하잖아요. 제현 씨도 종종 기획 제안을 받는 것처럼, 좀처럼 비평은 직업으로 존재하지 않는 거죠. 비평가가 타자인 이유는, 늘 그들이 자신의 언어로는 스스로를 주체화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비평가는 미술의 언어인 ‘시각’을 사용할 수 없어요. 비평가는 전시를 만들 수가 없고, 이미지를 만들 수 없으니까요. 그들은 늘 자신의 이름이 아닌 작가나, 기획의 이름으로 자신을 드러내야 해요. 홀로는 존재할 수도, 주체화할 가능성이 차단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평가는 오히려 소수자보다는 타자에 더 가깝도 생각해요.

U 그럼 비평가를 하는 이유는 뭐에요? 소설가 하면 되잖아요.

C 방금 제가 말한 부분을 뛰어넘고 싶어서요? 저는 오히려 내 이름, 내 언어로 비평을 하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평을 시작했던 것 같아요. 작업도 전시에도 기대지 않고, 누가 불러주지 않아도 모두가 읽을 수 있는 글을 쓰겠다. 제현 씨가 얘기했던 것처럼 소설가나 문학비평가가 되면 주류의 언어를 쓰는 거잖아요. 거기선 모국어인. 그렇게 싸우고 싶지는 않았어요. ‘시각’ 언어뿐인 벙어리에게 말을 시켜보고 싶었어요. 미술이 목소리를 갖게 되고 점자를 읽을 촉각을 지닌다면 그 목소리와 지문은 어떨까? 난 그게 매력이었어요. 아까 한 얘기를 좀 이어가자면 그래도 소수자의 차이를 강조하는 관점이 만들어낸 성과가 있다면, 저는 오히려 제현 씨가 말한 대로 그걸 잘못 말하면 안 된다는, 어떤 경계의 기제 그러니까 조심해야 할 것들을 생산해 낸 점 같아요. 그게 우리의 실천을 소극적으로 만든다면 부정적이겠지만, 그런 방향으로 가지 않고 우리의 실천을 좀 더 정제되도록 하는 것도 분명 있어요.

U 그렇죠. 미투 이후로 사회 전반에 조심하는 분위기가 깔렸죠. 개인적으론 환영할 만한 변화에요.

C 제현 씨가 방금 조금 전에 얘기한 것처럼, ‘나도 언젠가는 소수자가 아니었을까’라는 고민들을 하게 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고도 생각해요.

U 맞아요. 하나 확실히 해두자면. 여기서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소수자는 절대 수적 열세를 말하지 않아요. 어떤 공동체 안에서 주류에겐 용납되지 않는 이질성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나 스스로를 재현할 수 있는 언어 자체에 대한 위기, 즉 정치적 발언에 대한 이야기고 권리의 이야기, 대화의 성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차이 있어. 우리도 소수자야, 몰랐어? 이런 이야기 아닙니다. 독자 여러분! 번외로, 소수자의 작업이라고 소수자적 맥락에서만 해석되는 것이 편견일 수도 있다는 당신의 지적은 무척 흥미롭네요.

이강승, <Untitled>, 2019, Graphite on paper. 출처:갤러리현대

여성주의

C 너무 다루기 어려운 주제야. 쉽지 않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제까지 얘기했던 LGBTQ+랑 소수자를 주어로 우리가 나눈 말들하고 구분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있어서고. 또 너무 우리 일상이랑 밀접한 주제기도 하고.

U 근데 소수자랑 여성주의는 또 다르죠. 저는 사실 여성주의에 대해 말 많이 했어서. 제가 미술계에 들어오고 나서 좋게 생각하는 전시 딱 세 개 있어요. 하나는 합정지구의 ⟪미러의 미러의 미러⟫, 하나는 상업화랑의 ⟪박원순 개인전⟫, 하나는 관훈갤러리, 사가의 ⟪귀귀 개인전⟫. 모두 논쟁에 붙여졌기 때문에 좋아해요. 요즘은 전시가 논문을 내는 거랑 유사한 방식으로 돌아가는 듯해요. 돈 받고 하는 워크샵도 무지막지하게 늘어나서 필드가 아카데미화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아요. 둘러보면 죄다 먹물이고 네트워킹이란 미명 하에 인맥 쌓기 바빠요. 다음 성과를 위한 성과, 다음 기금을 위한 작업, 누굴 만나도 잠재적 비즈니스 파트너기에 굉장히 사교적인 톤을 유지하고, 잘 나간다 하면 좋아요로 호응해 주고. 아무튼. ⟪미러의 미러의 미러⟫ 논쟁 때 제가 여성운동가의 글에 논박하면서 할 얘긴 다 했었기에, 재연 씨 얘길 들어보고 싶어요.

C 너무 자기 글 홍보하는 거 아니에요?

U 자기PR시대에 저도 적응해야죠.

C 흔히 여성주의 비판할 때 많이 나오는 메갈이나 워마드의 이야기들부터 시작을 하고 싶어. 소수자와 비슷한 맥락일 수도 있는데, 저는 그들이 이루어놓은 성취가 하나 있다면 여성의 공격성을 가시화했다는 지점이거든요. 제가 최규석 작가의 <송곳>을 되게 좋아하고, 여러 번 읽었는데 거기서 나오는 대사 중에 제일 인상 깊었던 건

U “디스 이즈 코리아 스타일!” 아니야? “여기선 그래도 되니까!”

C “인간에 대한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온다. 살아있는 인간은 빼앗기면 화를 내고 맞으면 맞서서 싸운다.”라는 대사가 있거든요. 권리는 누군가의 선의에 의지하는 것만으로는 지킬 수 없어요. 메갈이랑 워마드가 그랬던 것 같아요. 그들의 급진적이거나 과격한 실천들은 여성이 피해자의 얼굴만을 지닌 게 아님을 증명했어요. 욕을 하고, 폭력을 가하고, 남성을 죽일 수도 있는 존재가 여성이기도 하다는 것. 좀 말이 거칠긴 한데, 이제껏 여성 운동이 여성의 역능을 제도적, 담론적 층위에서 증명하려고 했다면, 메갈과 워마드의 실천은 거기서 벗어나 지저분하고 너저분한 일상으로 나와 증명한 것이거든요. 그게 옳든 그르든 남성이 처음으로 여성에게 위협당할 수 있다고 인식하게 되었잖아요. 이은새 작가의 그림에서 등장하는 여성상에서 저는 비슷한 맥락을 읽어요. 그의 화면은 클리셰에서 벗어나 있어요. 이은새의 여성은 눈을 피하지 않고요, 오히려 괴기하고 위험하고 공격적으로 보이죠.

U 시의성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이은새 작가의 작업 볼 때면 바바라 크루거도 자주 생각나더군요. 제가 봤을 때도 한국에서는 2세대(빅팀)와 3세대(파워) 페미니즘이 시대 구분이 거의 안 될 정도로 동시에 나왔던 것 같아요. 저도 좋았던 건, 원래 남자만 여자를 특정 프레임으로 몰고 헐뜯을 수 있었거든요. 김치녀, 뭐뭐녀. 아담적 명명권이라 해야 하나. 이제 여성들이 온갖 반격기를 만들어냈잖아요. 저는 그때 진짜 쾌감을 느꼈어요. 그래서 나중엔 게임에서 아이디 때문인지 저를 여자로 알고 욕하는 잡것들이랑 키배가 붙으면 이 언어들로 상대방들과 싸웠어요. 그 언어들이 있으니 너무너무 든든하고, 남자들 입을 막아버릴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이런 언어가 없던, 이전까지의 여성들의 삶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었어. 근데 어이없게 저만 영정을 먹더라고요? 한국남자들의 징함을 느꼈죠. 여성주의에 대한 상찬만 했네. 문제는 없어요?

C 문제가 한바탕 지나간 것 같지 않아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성주의 운동은 당사자성을 가장 큰 기반으로 삼았어요. 이건 앞에서 LGBTQ+를 얘기했을 때,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소수자성, 차이를 강조하는 방식과 같았죠.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의식화하고, 여성답지 않은 여성을 속아내고, 남성을 비롯한 외부 세력과의 연대를 거부하고. 어떤 페미니즘이 정말 진실한 리얼한가를 논쟁하면서 그런 차이의 결정체를 통해 운동을 추동하려는 방식이 있었다고요. 근데 최근에는 버틀러를 비롯한 3세대 페미니즘이 제안하듯 제3의 성 혹은 성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방식으로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을 확장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고 느껴요. 여성뿐 아니라 이분법적 성과 남성 중심주의에 억압을 겪는 ‘n개의 성’을 기반으로 사회의 모순을 만들어낸 정치의 문제로 전용해 나가고 있어요. 모두의 문제 이른바 정치 운동이 되어가고 있다고요.

U 맞는 말이에요. 10년 대보단 페미니즘 화력이 떨어진 것처럼 느껴져요. 백래시 등으로 체감되고 있기도 하죠. 워마드에 대한 넷의 관심도 많이 줄어들었고요. 저는 ‘시헤녀만 여성이냐’ 논쟁이 생각나요. 교차성 페미니즘과 레디컬 페미니즘은 서로 평행선을 그리죠. 저는 시헤녀만 여성이라고 할 때 범주가 성기에 접착되어 있어서 사실 동의는 못하겠어요. 생물학만 힘을 얻는 구조니까요. 100년 전에도 이렇진 않았거든요. 우리 로자 선생님이 왜 부르주아 여성이 아닌 프롤레타리아 남성과 연대해야 하는지 너무나도 명쾌하게 알려주셨잖아요. 저는 이분법을 사랑하지만 그건 반대항을 상정할 줄 안다는 의미에서에요. 또 이렇게 로자 선생님에 대한 사랑 고백을 되풀이하네요.

C 페미니즘 운동이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현 씨가 말한 것처럼, 페미니즘은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그 너머에 남성주의적 질서를 고착화한 자본주의가 있다는 데 동의해요. 결국 칼날이 향할 곳은 체제일 거에요. 각자의 길도, 방법론도 다르지만 우리는 정치라는 거대한 장에서 만날 거에요. 소수자의 정치를 말했던 것처럼, 페미니즘의 정치가 불붙기를 바라요. 이건 여담인데, 미술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사조, 이즘을 중심으로 사유하는 시대는 넘어갔잖아요 마르크스적으로 사고한다고 얘기하지 나는 막시스트로서 사유한다고 얘기하지 않는다고요. 늘 사상에는 그 사상 하나만으로 해결하거나 살필 수 없는 지점이 있고, 어떤 주의자가 되는 것이 불러오는 전체주의적인 비극을 종종 목도하기도 하니까요. ‘~주의’가 아니라 ‘~적’이라는 사고는 그 사상에 충실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그 사상이 다른 사유를 끌어안고 저변을 넓힐 가능성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당연히 여기엔 다른 사유는 물론 다른 연대체, 기구, 운동체와 연결이 될 여지도 함께 있어요. 에코 페미니즘이 환경 운동과 여성주의 운동이 함께 가는 길을 만든 것처럼, 페미니즘과 페미니즘과 다른 것(페미니즘 아닌 것이 아닌)의 연대가 더 폭넓어졌으면 좋겠어요. 페미니즘이 연대의 기반이 되고, 핵심 이념 중 하나가 되는 방식으로 우리의 운동이 재구성됐으면 좋겠어요.

U 이상으로 페미니즘을 가르친 조재연 선생이었습니다.

C 맨스 플레인을 제대로 했네. 사과할 시간을 줘요.

U 안 드릴래요. 다음 인간 챕터에서 우리가 얘기 나눌 건 네 가지에요. 포스트 휴먼, 수행성, 신체성과 물질성, 기억.

이은새, <눈 비비는 사람>, 2017, 캔버스에 오일. 출처: 학고재갤러리

포스트 휴먼

C 포스트 휴먼이라고 했을 때는 보통 탈신체와 관련한 담론이 많이 언급이 되죠. 기계나 동물하고 연결된다든지, 신체가 물질에서 벗어나 있는 어떤 가상적인 영역으로 옮겨진다든지 하는 얘기들이요. 그 연장선이긴 한데 특히 비인간에 관한 사유도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동물이나 사물을 주체로 한 이론을 예로 들 수도 있겠죠, 그것과 맞물려 인간을 재발명하려는 움직임 혹은 그로써 어떤 비인간적인 존재, 자연을 주체로 편입시켜서 더 평등한 세계를 이룩하려는 시도가 포스트 휴머니즘의 기반이 될 것 같아요. 이 정도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요?

U 포스트 휴먼이랑 트랜스 휴먼은 구분해야 될 것 같아요. <사이버펑크 2077> 보면 신체에 기계를 이식하는데,(임플란트라고 불러요.) 이런 식으로 초인을 획득하는 방식을 트랜스 휴먼으로 부르고, 포스트 휴먼은 좀 더 포괄적인 개념 같아요. 차기 인류? 인류를 상상하는 방식 자체를 이르기도 하고요. 푸코가 『말과 사물』 마지막에 인간은 파도에 씻겨 지워지는 바닷가 모래 위의 얼굴처럼 소멸할 것이다? 뭐 그런 말을 하잖아요. 의미심장하지만 사실 인간이 껍데기만 유사하지 사회적 형식에 따라 낯빛을 달리하니까요. 포스트 휴먼 관련한 작업 좀 아시나요?

C 이형구 작가가 제일 먼저 떠올랐어요. 특정 신체를 확대하거나, 왜곡을 통해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인간의 형상으로, 인간을 재사유하게 만든다든지 혹은 특정 장기를 대규모 설치로 전환해서 신체를 일종의 영토처럼 사고할 수 있도록 만든다든지. 예술에서 포스트휴먼의 역할이 인간을 물리적으로 변형시키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재사유를 통해 인간을 재발명하는 데 종사하는 것이라면 이형구 작가는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죠. 근데 사실 지금 인류가 포스트 휴먼 아니에요? 나는 왜 또 공산주의가 생각나는지 모르겠는데, 클리셰처럼 말하는 것 중에 하나가 코뮤니즘이 실패한 것은 사람의 욕망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많이들 이해하잖아요. 근데 그 핵심은 새로운 세계가 확립되기 위해선 단순히 물질적인 토대만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걸맞은 인간을 탄생시켜야 된다는 거거든.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포스트휴먼은 신체의 변형이라는 틀을 통해서 새 시대로 갈 때 우리는 어떤 인간이어야 하는지를 고찰하는 작업 방향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구좌파적 마르크스주의는 기술이 반인간화나 반자연화를 촉진한다고 봤잖아요. 근데 시몽동에서부터 발원하는 몇몇 사유의 흐름은 인간이 기술과 공진화한다는 점, 그 기술과의 앙상블을 통해 집단적 소통을 생산할 수 있다고 보던데요. 사실 도시에서 태어났으면 도시가 자연이죠. 

C 1차 자연에서는 인간이 환경을 소외시키는 게 문제였어요. 그런데 2차 자연은, 환경이 인간을 소외시켜요. 노진아나 정금형, 김재연 등의 포스트아포칼립스적 작업에는 그 소외를 극복하지 못하리라는 비극적 전망이 담겨있죠. 저는 이들이 전달하는 절망이 희망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절망이에요. 왜요, 숱한 재난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우리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게 만들었잖아요. 코로나19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단 희망이 경제도, 산업도 바꾸지 않고 그저 버티기만 하면 되는 현실 안주를 만들었다고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 비극을 넘어설 수 있다는 믿음이 아니라, 결국 우리는 폐사할 것이란 저주에요. 그런 선에서 제겐 이들의 작업이 역설적인 의미로 가장 희망적이에요.

이형구, <Altering Facial Features with H-WR>, 2007, 혼합재료. 출처: 부산시립미술관

수행성

U 수행성 차례입니다. 수행성 이젠 좀 올드한 느낌이지 않아요? 그래도 여전히 밀어붙이는 사람들 많잖아. 아트인컬처는 뭐라고 했나요?

C 조각이지 뭐. 근데 요즘 조각도 별로 아닌 것 같다.

U 그렇지. 조각의 조건을 살피는 동시에 확장하는 실험을 하고 있지. 아니면 대주제 ‘인간’이랑 연관시켜 볼까? 스트로크-수행성 같은 건 예전 이야기같고 좀 더 현대미술의 컨셉추얼함에 맞춰 보면… 진정성이나 자기실천?

C 당신이 말한 대로 스트로크든 리서치든 아니면, 거기서 퍼포먼스를 하든 그 자체가 작가의 수행성으로 표상되고, 그게 작가의 능력이나 작업 세계를 암시한다고 볼 수는 없는 것 같아. 우리가 작업을 볼 때, 그 과정을 면밀하게 추적하고 탐닉하는 시기는 지났으니까.

U 작업 자체의 로지컬한 맥락을 보는 경우가 많죠. 과정도 그 맥락 안으로 수렴되고. 더 얘기해주세요.

C 수행성하면 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떠올라. 그가 2017년 한 포럼에서 “나는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다고. 근데 문재인이 정말 페미니즘적 시각을 갖고 있든, 철학을 공부를 했든 간에, 그 선언을 통해 그의 모든 정책이나 행위가 페미니즘과 연결되기 시작했다고. 뭐만 하면 ‘페미 눈치 본다’, ‘이 페미니즘은 틀렸다’처럼 양쪽에서 공격을 받았어. 미술 안에서 수행성 중에 가장 대표적인 건 화이트 큐브지. 흰 벽으로 둘러진 공간으로 사물을 갖고 오기만 하면, 그 사물은 우리는 그 안에서 특별한 인식이나 의미를 찾게 유도하잖아. 존 버거가 말한 것처럼 ‘같은 것을 보더라도 다르게 보라’, ‘보지 말고 읽어라’ 이런 것. 그리고 그 수행성이 공간에 의지하지 않고 작품 자체가 품게 되었을 때, 이미지는 우리가 세계를 보는 방식을 변화하게 만들 거야. 조각은 대리석을 보게 만드는 것을 넘어 대리석에 ‘관해’ 이야기하게 만들어. 실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실재 너머를 보고 행동하게 만든다고.

U 전 가장 극단적인 수행성의 형식은 예언이라고 생각해요. 옛날에 제가 쓴 글 잠깐 가져오죠. “예언은 언표로 나타나는 즉시 마술적인 힘을 발휘하며 자신의 게임 안에서 상황이 전개되도록 원형적인 시제를 형성한다. 그것이 달성되건 달성되지 않건 소급적 상상을 거쳐 최초의 순간으로서의 언어를 상기하게 만들며, 동시에 모든 사건들은 예언의 장에서 이룩된 언어의 논리였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 반면 카산드라의 신화는 독특한 예언의 성격을 짚어낸다. 목마를 들이면 트로이가 망할 것이라는 그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목마는 성 안에 안착한다. 누구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음에도, 또는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언이 이뤄지는데, 개개인의 납득과 믿음을 넘어선 객관적인 영역에 힘을 행사하며 자기의 언표를 확증하고 회수하기 때문이다.” 이때 저 필력 지렸었네요… 아무튼 하고 싶은 말은, 수행성의 힘이 현실과 관련될 때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허구야말로 수행성을 추동해요. 사회적 사실이 언표의 수행성을 떠받치고, 또 그렇게 하도록 현실을 만들어내는 거지, 허구라고 해서 수행성과 외떨어진 건 아닌 거죠.

신체성과 물질성

C 신유물론 다시 나오면 되나요?

U 신유물론 얘기해도 되죠. 어우 솔직히 난 지겨워. 인간과 물질을 재사유하면서 물질을 사변 안에서 재정위하는 기획들이 그렇게 크리티컬한가? 저라면 이럴 바에 물리학을 하겠어요. 물리학이 대상을 크기, 위치, 속력 등으로 혼 빠진 것처럼 대한다고 다르다고 할 참이면 양자역학을 하라고 권해야겠죠. 전 원자에 관해서 이런 사변적인 테크닉으로 접근하는 건 효율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요. 실험실이 훨씬 간결하고 설득적이고 정합적인데다가 합의도 수월하죠. 제가 생각했을 때 유물론의 위대함은 원자의 운동에 관한 학설일 때가 아니라, 어떤 상부구조적 테마들이 실은 하부구조에 기초해 있다는 신학적 위상의 역전을 공표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리고 물질이 운동한다는 거, 21세기 교양인이면 누가 모르나요. 새삼 철학이 이러는 건 철학이 길을 잃었기 때문이라고까지 생각돼요. 하나 더, 자연과학적 명제가 사회과학의 증거처럼 사용될 수 있다고 하는 사고방식, 나아가 사회과학적 논증을 자연과학에 기대는 이 오래된 전통 자체를 전 불신해요. 사회과학에겐 사회과학의 진리가 있어요. 그런 점에서 원자 단위의 운동보단, 상품세계 안에서 왜 사물이 살아 움직이는지를 설명하는 물신주의 개념이 여전히, 그리고 훨씬 흥미로워요.

C 우리가 라투르 얘기하면서 ‘사물들의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썼잖아. 여기엔 인간들만을 가지고 민주주의나 평등을 말하기에는 부족했던 한계가 배경으로 있다고 생각해. 민주주의는 천한 자가 귀족, 왕과 동일해지는 게 아니라, 그들을 천한 자의 자리로 내려앉히는 방식으로 작동했다고. 근데 오늘날에 자본주의 구조 혹은 후기 민주주의 구조 안에서는 그런 관점의 계급 구분이 불가능해. 오늘 실컷 얘기했듯 표면적으로는 계급 없는 계층 사회고, 모두가 다 달라서 줄 세울 수 없는 차이의 세계라고. 더 이상 인간을 주어로는 민주주의에 대한 발화가 불가능해진 거죠. 그런 지점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왕이 천한 자로 몰락했듯이, 급진적 민주주의를 위해선 인간 모두가 한 번 더 몰락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 인간의 사물의 지위로 내려올 때,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니었던, 사물과 인간 사이에 있었던 자들이 함께 구원되는 것이지.

U 윽. 우리가 철학 바깥에서 제대로 인간 중심적이긴 했나요? 자본주의 세계에선 자본이 중심 아니에요? 인간도 소외된 마당에… 신유물론이 죽은 사물처럼 보이는 어떤 대상들이 실제론 얼마나 능동적이고 사변과 무관하게 존재론적이며, 바로 그로 인해 생기가 있는지를 말하잖아요. 이런 방식으로 물질을 다시 정초하면서 인간과 물질이라는 이분법 자체를 해체하기까지 이르죠. 이 사유들은 물구나무 선 물활론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아요. 이런 사유가 최근 인간이 이 행성에 어떤 위치로 재인식할 것인지 돕는다곤 하는데, 이런 의식개혁이 사회개혁으로 이어지는 게 타당한 물길인지 의심스러워요. 18세기 중엽에도 이런 식으로 사물과의 관계를 재고하려는 흐름 있었죠. 

C 신유물론을 정말 거칠게 요약하면 ‘인간 너 뭐 돼? 사실 사물들에 의해서 움직이는 거 아니야?’라고 할 것 같아. 혹은 ‘사물들과 동등한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거기에 하위주체로 머물고 있는 거 아니야’라고 하든지. 신유물론에서 말하는 수행성으로 새로운 실천을 열어갈 수도 있지만 그전에 우리를 찌르는 부분은 이런 거지. 인간이란 얼마큼 허약하고 가냘픈 존재인가.

U 연관해서 광주, 부산, 제주 비엔날레의 성과들을 같이 다루면 좋을 텐데. 시간이 부족하니 다시 신체성과 물질성으로 돌아가죠. 신체성과 물질성이라는 건 윤원화 씨가 마테리알 행사에서 했던 얘기가 있거든요. 오늘날의 인간 인식을 위한 방위판으로 6가지 요소를 제시해요. 서로 얽힐 수 있는 개념들이 3쌍 있는데 그중 하나가 전산학 대 지질학이에요. 전 이걸 신체성과 물질성의 비례식으로 놓을 수 있다 생각해요. 심장의 동방결절로부터 뿜어지는 전기는 손가락을 타고 스크린을 투과해 전지구와 연결되죠. 지질학은 최근 일어나는 물질에 대한 반성들과 연관될 수 있겠어요. 윤원화 씨 말대로라면 이 두 접근은 우리 세계의 시간과 공간의 궤적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다고 하거든요. 그렇다면 동시대 미술의 키워드로만 제한하기는 어려운 부피의 낱말이겠네요. 사실 너무 방대하게 뻗어나갈 수 있는 주제라. 또 물질이 곧 신체이기도 하죠.

C 감정이 결국 물질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는 우리를 서글프게 만들어요. 새벽을 지새우게 만들던 마음이 고작 물질의 일이라면, 그래서 신경 물질을 조절할 의약품으로 해결된다면, 위로가, 그걸 전달할 예술이 뭐가 필요하겠어요. 근데 사실은요, 감정이 물질이었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었어요. 그리움에 물들어갈 때, 함께 있는 애틋함에 내가 타일의 먼지처럼 흔들릴 때, 불안이 혓바늘처럼 움틀 때, 이런 상황 모두가 물듦, 먼지, 흔들림, 바늘, 움틂이라는 물질 언어를 빌리지 않고선 도무지 표현되지 않아요. 그렇다면 미술이 사물을 가까이에 두려는 건, 그만큼 사람에 가까워지고 싶어서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너무 관점 없는 이야기이긴 하죠. 근데 위험한 지점도 있어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 이론이 지닌 맹점이 그런 거잖아요. 담화에는 몇 개 규칙이 존재하고, 그 규칙을 경유하는 말 나눔을 통해 선한, 합리적인 결론이 나올 것이다라는 믿음이요. 근데 전제돼야 할 건 그 논의가 과연 공평하게 진행될 수 있느냐 더 나아가, 그 테이블 자체가 만들어질 수 있느냐는 거에요. 노사정 대화 좋죠. 근데 그 테이블의 전제 문제를 배제하고선 합리성을 말할 수 없어요. 제현 씨가 제시했듯, 사회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는 인식론으로서의 신유물론이 부조리를 해소할 순 없죠. 사실 처음 얘기했던 대로 정치가 필요하다는 말로 돌아올 수밖에 없어요.

기억

U 기억은 동시대 미술의 키워드가 될 수 있죠.

C ‘될 수 있어요?’라고 물어볼 줄 알았는데

가끔 커브도 던져야죠. 그리고 이건 너무 자명해서… 제 스승이 말하듯이 요즘에 인간 개인을, 스스로 존재를 보증해 줄 수 있는 매체가 두 가지 있다면 하나는 취향이고 하나는 기억이에요. 문제는 취향은 내가 만들어내고 있지 않고, 기억은 부정확하다는 거에요. 그럼에도 작가들이 기억을 지지하는 구조는 물신주의적 부인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 같아요. ‘그래 기억 부정확하지. 하지만…’ 역사에 대한 불신과 다시금 연루되죠. 그래서 당사자성-기억이 이렇게 히트하나 봐요. 당사자도, 기억도 온전치 않지만 그것의 대행자인 정치와 역사가 침몰했기 때문이겠죠. 이제 공적 발화와 보증을 통해서 우리가 진실을 생산할 수 없게 되었다고 강력하게 믿는 것 같아요. 심지어 유머조차도요. 밈의 수명은 공중파에서 유통되는 순간 다하잖아요. 예술도 그렇죠. 공공미술. 모두가 답이 없다 느끼잖아요.

C 제현 씨가 이야기한 대로 취향과 기억이 동시대의 정체성을 보증하는 두 매개항이다 이렇게 얘기했을 때 그 말을 받는다면 지금은 때때로 어떤 취향이 기억을 구성하는 가장 강력한 단위가 되기도 하잖아요.

U 맞아요. 둘이 하나처럼 보이기도 해요.

C 서동진이 임흥순의 작업을 보고 썼던 글을 떠올렸어요. 거기서 서동진은 역사는 ‘기억’과 적대 관계에 있다고 고백하죠. 역사가 기억이 아니라는 것은 주관적인 경험, 이른바 추체험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죠. 근데 다시 말해서 역사는 주관에서 벗어나 사건을 객관화하는 일이고 반성과 관계해요.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에서 임흥순은, 일본과의 역사를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 한 사람의 유품과 그의 뜨개 소품으로 제시했어요. 이때 역사는 사유 가능한 ‘메시지’이기보다, 감정 이입과 정서적인 반응을 촉구하는 삶의 고통에 대한 경험으로서 다가오죠. 드라마 <응답하라>로 사례를 옮기면 더 명확해져요. <응답하라>에서 나오는 역사는 공동체 모두를 묶을 수 있는 서사가 아니라 삼미 슈퍼 스타즈, 팩 우유, 마이마이 같은 추억을 담은 이미지로 갈음되니까요. 공동체의 역사 대신에 개인의 기억으로 역사를 치환하려는 방식이 예술 안에서 지금 횡행하고 있어요. 물론 반대의 작업도 있죠. 저는 김지영을 생각했는데, 7년째 세월호를 주제로 작업을 하고 있죠. 그가 그리는 <붉은 시간>엔 나 홀로 기억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이미지가 없어요. 오로지 ‘우리’만 개입될 수 있죠. 화면엔 그날 이후로 우리는 어떻게 다른 시간을 살게 되었고, 어떻게 그날을 사유해야 할지에 대한 촉구만 존재해요.

U 그렇군요. 한편으로 기억 자체만 생각해 본다면 이제 우리가 기억하는 게 아니라 우리 대신 기억하는 어떤 사물, 객체 그런 것들이 있다는 익숙한 이야기로 갈 수도 있죠. 만약 기억이 인간을 만든다고 한다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카카오톡 메신저 기록이죠. 그래서 저는 이제 기억력도 떨어졌어요. 이제 기억의 필요성 같은 것들을 못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옛날에는 음유시인들이 열몇 시간 되는 호메로스 대서사를 외워서 밥벌이해 먹고살았거든요. 기억술이라는 게 존재했죠. 성 같은 건물을 상상한대요. 그 안에 특정한 기억을 수납하는 형태로 기억을 물질화시켜둔다는 거에요. 이제 하드디스크가 우리의 메모리니까 우리는 이미 되게 사이보그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좋아하는 기억 있어요? 좋은 기억 하나씩 얘기하죠. 좋은 기억 나쁜 기억.

C 좋아하는 기억이라기보다는 그냥 제 인생에서 가장 이렇게 저를 형성했던 기억이라고 한다면 어머니가 떠오르죠.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귀가 나랑 듣는 게 늘 달랐어요. 나는 그래서 내가 얘기하는 것과 혹은 내가 기억하는 것과 엄마가 말하고 기억하는 것이 다르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죠. 그렇게 성장한 저는 학교에 들어가서도 상대방이 내가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을 들었을까 혹은 똑같은 것을 기억할까 의구심을 품었어요. 학년이 바뀌면 그 사람이 날 기억할지 안 할지 몰라서 함께 어울려 지내던 친구하고도 인사를 하지 않았죠. 그러면서 타인을 이해하는 일, 나를 이해받는 일에 대한 몰두가 지금처럼 글을 쓰도록 만들었어요. 아까 벙어리(미술)한테 목소리와 지문을 주고 싶었다 했잖아요. 그 벙어리가 사실 저거든요.

자신을 형성한 기억이라… 비평가로서 저를 형성한 기억이라면 역시 어떤 환자의 이야기네요. 케이스로 접한 환자였는데, 해외 여행 도중 야수파 그림을 보고 조현병이 발병했다고 해요. 전 그 전까지만 해도 “점 하나 찍고 뭔 짓이야?”하고 생각하다가, “그림이 대체 뭐길래 사람을 미치게도 만드는 거지?” 싶어 공부를 시작했어요. 밤엔 일을 하고 낮엔 도강을 다녔죠. 그러다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다시 기억으로 돌아오면, 레비스트로스에요 푸코에요? 부권적 계보가 누락하는 전체 가계의 은닉된 역사성을 말하는 사람이요. 역사 자체가 사실 이런 거죠. 무엇을 상속하고 무엇을 누락하느냐. 우리가 무엇을 기념하고 무엇으로부터 우리를 구성해 낼 것이냐. 무엇을 공적인 기억으로 쓰다듬을 것이냐. 근데 이런 기억의 등가성의 세계에선 공동체의 네트를 흔드는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게 없어요. 사고만 가능해요. 말 그대로 재난이요.

C 사건이 없죠 사건이. 아까 세월호 참사를 말한 것처럼 ‘그날’ 이후 혹은 ‘그 사건’ 이후라는 공동의 지평을 형성하려는 노력 자체가 없거나 그런 것들을 부정하려고 하고 있어요. 반대로 그런 부정의 형식을 통해서 또 망각을 이용해 가지고 현 체제를 유지하려고 하고.

U 그런 식으로 역사가 유지되지 못하면 기억도 제대로 기억되지 못해요.

C 기억이 아니게 되죠.

김지영, <Drawing for Glowing Hour>, 2022, Oil on paper. 출처: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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