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연×엄제현의 티티카카 [1]테크놀러지

조재연, 엄제현

본 기획은 미술전문지 『아트인컬처』의 23년 3월호 특집 「동시대미술 키워드」의 톺아보기로, 아트인컬처의 기자이자 비평가인 조재연과 함께합니다.

엄제현(이하 U) 뭐라고 시작해? 운 한번 띄워보세요.

조재연(이하 C) 지금부터 조재연과 엄제현의 티티카카를 시작하겠습니다.

U 작위적이네요. 이번 토크로 몇 명의 적을 만들 각오까지 하셨죠?

C 저는 단 한 명의 적도 만들 생각이 없는데요.

U 그럼 여기서 접죠, 그냥.

U 이거 하다보면 뭐 어차피 실명 나오고 할 수밖에 없어요. 피 튀길 수밖에 없어, 그렇지 않아?

C 그런 내용이었어? 나는 개념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줄 알았는데?

개념을 담지하는 상징적 신체를 한꺼번에 다루지 않겠어요? 몰라. 그래, 이제 피 튀기는 거 그만해야 돼. 아름다운 거 해야죠.

C 사실 무언가에 대해서 말하는 거 자체가 적을 만드는 거 아니야?

U 그래야 되는데 기름칠하는 말만 돌아다니는 것 같아서 실망스러울 때가 있네. 아무튼. 이번에 아트인컬처에서 진행한, 큐레이터 35인에게 물어본 키워드들을….

C 당신 지금 진행하는 거야?

U 어. 키워드를 피드백하면서, 이게 진짜 동시대미술의 키워드인지 따져보는 시절이 되겠습니다. 아트지가 총 7개의 챕터로 구분하셨는데, 오늘은 그중 ‘테크놀러지’ 파트를 다루도록 하죠. 테크놀러지에 대해 할 말 있어요? 일단 대주제부터 건드리자. 있어 없어?

C 먼저 얘기해 봐.

U 아트지가 꼽은 테크놀러지의 하위 범주들을 봤을 때 이 낱말을 첨단의 과학에만 천착해서 사용하는 것 같아. 사실 테크놀러지는 그런 건 아니잖아요. 통치의 테크놀러지라고 한다면 저 원시시대에 별을 보고 세상의 운명을 갈파한다며 대대손손 해먹은 샤먼의 테크닉부터 20세기에 폭발한 이데올로기 전략까지도 아우르는 거잖아요. 그러니 다분히 물질에 치우친, 사이언티픽한 연상으로만 이어지는 건 답답해요. 안 그래요?

C 그렇게 보면 이상할 수 있는데, 물론 테크놀러지를 두고 형이상학적 측면과 물질적 측면 양쪽으로 말할 수는 있겠지. 근데 기획도 그렇고, 참여한 미술인도 그렇고, 키워드를 명징하게 꼽아보자는 것이지, 키워드를 확장해 보자는 이야기는 아니야. 개념이 방대해지면 다양한 요소를 끌어안을 수는 있지만, 실체가 흐려질 수도 있다는 것이지. 일단 여기서는 테크놀러지는 물성적인 측면, 당신이 말한 대로 과학 기술적인 측면을 다루니까, 그것에 국한해서 말해보자. 테크놀러지의 변화가 미술계에서 어떤 변화를 견인하는지에 관한 부분이니까.

U 네. 편집하신 분의 말을 들어야죠.

C 세부 주제로 들어가면 알겠지만 테크놀러지가 진짜 최첨단의 기술이 작품을 변화하는 사례도, 오히려 반대로 그 테크놀러지를 인식하고 그것 아닌 것을 하겠다고 하는, 그러니까 정반대로 향하는 흐름도 존재해. 아날로그적이거나 아니면 글리치처럼 반-테크놀러지적인 경향이 있다고. 보통 더 나은 재현이나 퀄리티 높은 가상을 향해서 가는 게 테크놀러지라고 생각하지만, 반대로 비재현이나 물성을 향해 가는 기류도 이 키워드에 포함해야 해.

부캐

U 그래요. 소주제를 통해서 확실히 해보죠. 아트지가 묶은 거니 리스펙 하겠습니다. 우리가 꼽은 것들은 부캐, 네오-버내큘러, 디지털 네이티브, 메타버스, 암호화폐, GPT, 게임, 숏폼 등이죠. 부캐부터 말해보면, 요놈이 동시대 미술의 키워드가 될 수 있어요?

부캐는 뭐. 사실은 뒤샹 때부터 있었던 거잖아. 뭐였지? 에로즈 셀라비(Rrose Sélavy). 일단 기본적으로 예술가라는 게 자신의 실존을 떠나서 가상적인 내면을 만드는 것을 통해 탄생하는 거고, 그런 측면에서 애초에 예술가를 1차적 부캐라고 얘기할 수 있지 않나. 따라서 동시대라는 타이틀보단 근대 예술이 탄생했을 때 새롭게 등장한 예술가 상이기도 하지.

U 신원이 분명했던 전근대적 공동체와 달리 도시가 만들어낸 삶과 화폐교환이 일반화된 세계에서 익명성이 등장할 수 있게 되죠. 더 나아가면 자아연출적인 이미지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삶을 살게 되고요. 이런 생각도 들어요.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금융소득이 노동소득을 까마득히 앞지르잖아요. 가부장제는 적어도 가장 한 명이 핵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단 말이에요. 그렇지만 이젠 맞벌이가 디폴트죠. 문화적인 차원에서 여성의 인권을 일부 개선하고 있다는 사이비 순기능을 제시하고(워킹맘은 두 배로 힘든데), 갭은 점점 더 벌어지고, 개인은 가족은커녕 스스로의 삶조차 한 가지의 일로 유지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서 투잡, 쓰리잡을 해요. 노동의 가치를 셈하는 추상의 계산기가 저쪽 편에 서서 악랄한 수식을 강요하고 있는 상황인데, 무대 위에선 능력에 따라 자유자재로 부캐를 만들고 부리는 유능한 인물상을 잉태한다는 듯 굴죠.

C 비슷하긴 한데 동시대와 근대의 예술가 상이 분리되는 부분은 부캐가 당신이 얘기한 것처럼 투잡의 형태로 늘어난다는 거지. 기존에 자신의 실존적인 영역 안에서, 그것의 연장선에서 탄생된 일차적인 부캐가 있었다면, 동시대에 와서는 그것과 또 다른 작업을 하는, 마치 매드클라운과 마미손이 하는 작업이 다른 것처럼, 류성실이라는 작가가 또 다른 예술가로서 체리장을 내세우거나 김동규 작가가 뀨르와 타르라는 새로운 부캐를 내밂으로써 평소에 자신이 진행하던 작업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부캐가 탄생한다는 점은 동시대에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 제현 씨는 부캐 없어요?

저는 부캐가 너무 많죠. 1급 사설탐정이기도 하고, 국제사립탐정협회의 협회장이기도 하죠. 의료인이기도 하고, 지금은 사람을 살리는 일로 벌이를 하고 있죠. 비평웹진 퐁 운영자에, 비평가에, 큐레이터에… 정체성 바꿔입기에 능통하죠.

그것들이 다 분리됐다는 느낌이 들어요?

U 들죠. 근데 내가 트랜스폼 한다기보다는 세계가 나한테 다른 방식으로 현전해요. 완전 직밍아웃 하진 않겠습니다만, 지금 있는 곳은 슈퍼 남초라 사고의 형태가 미술계랑 너무 달라요. 미술계에선 아작 날 수 있는 말들이 너무 쉽게 돌아다니는 걸 목격해요. 반면 미술계는 또 어떤 부분에선 한없이 냉정하고 잔혹하거든요. 그러니 라투르 같은 사람이 ‘우리는 서로 다른 행성에 살고 있다’고 하는 말이 그닥 매혹적인 말은 아니죠.

C 그러고 보니 옛날엔 부캐라는 말을 안쓰고 페르소나라고 많이들 했잖아.

페르소나 시대 때만 해도 스스로 쓰고 있는 가면이 주체의 요체라고 여겨지지 않았죠. 가면을 벗으면 지을 수 있는 나만의 얼굴이 있었는데, 이젠 정체성이란게 가소성을 띄게 되면서 정치적인 위력 또한 반감되고, 그때그때 맞는 실천에 어울리는 부캐를 생산하는 방법론적 개입 정도가 되고 마는 것 같아. 스타일로서의 주체? 부캐가 대타자로부터 날아오는 호명에 불응하기 위한 유쾌하고 정치적인 에너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긴 어렵죠.(장수풍뎅이연구회가 스쳐가네요.) 뒤샹만 해도 정체성의 전복이나 위장이라는 전략이 성립되었다면, 이제 보게 되는 건 요가에 가까운 관절 구부리기. 그것의 배면은 프레카리아트 노동자의 관절 꺾기일 테고.

C 주체를 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잖아. 하나는 세계에 휩쓸리지 않는 주체. 세상, 관계, 역할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나도 그에 따라 차이를 지닌 존재로 바뀌어가지만 그래도 유지되는 게 있다면 ‘나’라는 것. 거대한 흐름에서 탈각되지도 소거되지도 않는 힘을 지닌 상수로서 ‘나’, 세상에 저항할 수 있는 역능을 지닌 주체가 있는 거지. 이게 모더니즘에서 말하는 주체라면 반대로 변화하는 세계의 맞춰 자신을 끊임없이 갱신하는 ‘나’도 있어. 들뢰즈가 말한 신체 없는 기관처럼, 더 이상 물성에 얽매이지 않고 변신, 적응하는 것을 역능으로 삼는 또 다른 주체상이지. 이게 포스트모더니즘이 일컫는 주체고. 오늘날 각광받는 주체 철학이긴한데, 뭔가 의심스러워. 새로움, 다양성, 차이를 요구하는 후기 자본주의 생산 논리와 맞아떨어진단 말이야. 이게 부캐에 반영된 것 같기도 하고. 이런 포스트 주체 담론을 비판적인 몸짓으로 여기기엔 어려운 지점들이 있어. 이건 전복도 저항도 아니야. 자본주의 논리의 내면화까지는 아니더라도 그걸 반증하는 듯한 뉘앙스를 줘버리는 거지.

네오-버내큘러

네오-버내큘러에 대한 규정을 좀 하고 넘어갔으면 좋겠어. 버내큘러는 특정 문화나 지역에서 사용하는 일상 언어로 토착어나 방언의 영역에 속하는 로컬리티를 의미한다네? 현대 버내큘러는 지배자에게 그들의 언어를 강요당한 하위 주체들이 그들 언어를 습득하고, 지배 질서에 복속된 뒤 다시 그것을 번영시키는 것을 통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는 일련의 과정이고. 근데 이렇게 설명하니까 더 어려워졌네….

U 쉽게 가죠. 250의 <뽕> 들어봤어요?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마냥 K-소리를 에디팅해서 만든 앨범이에요.

[FULL ALBUM] 250(이오공) – 뽕 / 전체듣기 – YouTube

U 네오-버내큘러가 동시대 미술의 키워드가 될 수 있어?

C 포스트모던은 모던에 역행하려는 움직임이었잖아. 초반에 말한 것처럼 아날로그적이거나 반-테크놀러지적인 이미지가 동시대적인 이유는 역행하기 위해서 동시대를 필연적으로 의식하기 때문이야. 동시대와 다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동시대성을 경유할 수밖에 없는 거지. 어떤 기술을 최대한으로 밀어붙이는 게 하나의 시류였어. 근데 그랬을 때 과연 그게 예술의 목표 중에 하나였던 가상의 실제화, 시뮬라크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기는 지점에 있다고. 오히려 기술을 통해 기술은 정답이 아니란 것을 깨닫는 것이지. 그래서 반대로 부서질 수 있는 물성을 지니고,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제2의 시류도 함께 만들어지는 거야. 테크놀러지를 극대화해 실재에 닿게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테크놀러지가 아닌 것, 테크놀러지를 무너뜨려서 부정하는 방식으로 물성에 닿게 하려는 아날로그가 복귀하는 거지. 그런 측면에서 오히려 뉴트로나 네오-버내큘러 같은 단어가 등장한 것이 아닐까?

시리 죄송하지만 뭐라고 하셨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U ㅋㅋㅋㅋㅋㅋ 좀 쉽게 정리해 줘요. 잘 이해 못 하겠다잖아. 빅스비야 시리야? 시리? 시리야! 아주 정확했어. 세 사람이 대화하고 있었네.

이게 AI의 무서움이야….

U 팍 치고 들어오는데? 확실히 테크놀러지가 진보의 극한에 다다랐음을 보여줄 때의 참조적인 대상은 아날로그야.(심지어 그것과 결별할 때조차도) FPS 게임들이 언리얼 엔진을 활용해서 하이퍼리얼리티를 만들어내잖아요. 그게 테크놀러지의 특이점이라는 듯이 굴죠. 근데 네오-버내큘러 같은 거는 단순히 기술에 국한된 활동은 아닌 것 같아요. 레트로의 귀환을 생각해 보면, 새로운 것에 대한 상상력이 사라져 자생적으로 나타날 수 없을 때 과거가 점만 찍고 우리한테 다가오면서, “유행은 돌고 도는 거야” 식의 폐쇄적인 문화적 시간을 자연처럼 처리할 때가 의미심장해요. 근 몇 년간 잇따른 상품들의 내용/형식 간의 무차별한 반죽을 너무 많이 봤죠.

이거 나는 리얼리즘하고 관련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아도로노가 리얼리즘은 실재의 재현이 아니라, 실재가 재현 불가능한 것임을 현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고. 아무리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그것이 증명하는 것은 여전히 사건이 재현 불가능하다는 거야. 우리는 리얼리즘을 통해 결국 가상만이 남아 있다는 어떤 불가피한 실패의 가능성, 불가능성을 본다고. 테크놀러지가 닿는 지점도 그런 것 같아. 당신이 얘기한 언리얼 엔진, 인공 신경망은 어떤 진실에 가닿으려는 몸짓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도달하는 장소는 역시나 이들이 실제가 아니라는 사실, 컴퓨터를 종료하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공허감만 존재한다는 사실이야.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지. 실재를 재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사실 최첨단 기술이 아니라, 반대로 기술 아닌 것, 기술 부정의 재현이 아닐까라는 의심이 싹트는 거지. 기술의 진보가 재현의 실패로 나아간다면, 아예 기술의 실패, 나아가 기술의 철폐를 시도해야 한다는 생각?

피자 도착

U 먹고 해야겠는데

C 먹으면서 하자

U 계속하시죠. 본인이 하던 말 기억나나요?

응. 실재에 대한 재현 불가능성을 얘기했잖아. 어차피 실패가 목적이라면 그냥 직접적으로 실패를 하는 방향으로 빠져들자. 실패를 밀어붙이자. 그냥 대차게 실패하자라는 방식으로, 굉장히 뉴트로 하거나 글리치 하거나 아날로그적인 방식을 택했다라는 것이지. 그 다음이 두 번째 이야긴데, 아날로그에 어떤 공통된 특징이 있다면 통제 가능성이라고 생각해. 아날로그는 적어도 직관적으로 이게 어떤 방식으로 구동되는지 이해할 수 있고, 물리적으로 힘을 가했을 때, 조작했을 때 내가 의도한 방향대로 변화할 것이다라는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잖아. 적어도 픽셀을 보면 내가 이 그래픽이 어떻게 어떤 방식을 통해서 이미지를 구현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고, 그리고 픽셀을 몇 가지 바꾸면 또 다른 이미지로 재탄생할 수 있다는 어떤 구성 방식에 대한 이해도 당연히 생기고, 조작 가능성들이 생기고 그런 거에 따라서 음악 같은 경우에도…

U 그러면 하이퍼리얼리티는 징후적이고 픽셀은 반동적이다? 그럼 자기는 네오-버내큘러 역시도 반동적이라는 거야?

C 최악의 방법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그러니까 실패를 예감하고 직감하지만 그것을 의도한다 점에서. 왜냐하면 이것 역시 가상과 실재에 대한 어떤 놀이의 연장이니까. 아까 그 우리 부캐 얘기할 때도, 이 부캐가 반동적인 측면을 갖고 있긴 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오히려 편승하거나 혹은 편승하지 않더라도 그런 것들의 반영이라는 지점에서 체제를 강화시키는 역할도 한다고 그랬잖아. 버내큘러도 마찬가지인 거지. 예술가의 어떤 이상 중에 하나는 가상을 실재화하고 실재를 재현하는 것이었다고. 근데 버내큘러 하자 이래버리면 이제는 정말 말 그대로 포기하고 그것들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이자는 것이기도 하잖아. 어떤 패배주의가 감돌고 있다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

U 흠.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의 구분을 요즘 식으로 대입하면 코드와 그래픽으로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글리치나 픽셀의 탐색은 여전히 형상 안에서, 코드가 일군 열매들의 당도만 놓고 분투하죠. 그게 밑동이라 믿으면서. 이는 여전히 우파-코딩-현실 창조하기 대 좌파-예술-흠결 폭로하기라는 녹슨 대립만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여요. 그보단 형상을 찢고 질료를 뽑아내라 말하고 싶어요. 전 실패 말고 성공이 좋아요. 우리가 이미지에 탐닉하는 타입들은 아니니까 넘어가도록 하죠. 시간도 없어요.

디지털 네이티브

U 이건 순전히 제 생각인데, 기성이 우리를 디지털 네이티브로 밀어붙이는 것 같아요. 그렇게 토큰을 일부 공유하는 행위로도 볼 수 있겠지만 세대 구분이 의제로 드러난 형태 같아서, 너네 세대는 어떤 감각을 지녔니, 어떤 감수성을 가지고 있니, 하고 응답하길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이런 고민과 무관하게 디지털을 매체로 작업하는 친구들을 뭉뚱그려 디지털 네이티브로 호명하고 전시를 이어나갈 테죠. 정작 이 네이티브들이 보여준 건 디지털에 이염된 포스트 휴먼 감수성보단 디지털의 바다에서 낚아 올린 월척들을 탁본하는 데 그쳤는데도요. 내가 못 보고 있는 건가? 우리가 매체 환경에 의해 묘하게 다른 감수성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기대하면서도 호응할 수 없는 불감증의 이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아. 뭐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리 둘 다 디지털 네이티브잖아.

우리는 디지로그지.

U 아.

C 사실 핀치, 줌 같은 게 일상적 제스처가 된 세대가 디지털 네이티브라고 얘기할 수 있을 텐데, 사실 이게 다른 의제에 비해서 큰 영양가가 있는 의제인지는 나도 좀 의심스러워. 굳이 미학적인 방법으로 따지면 월등한 그래픽이나 프로그램으로 작업을 구현하는 방식에서 디지털 네이티브를 찾기보다는, 실제 세계를 관찰할 때 디지털의 문법으로 관찰하는 작업으로 디지털 네이티브를 규정해야 하지 않을까. 김희천이 대표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가령 영상을 찍을 때 물리적 세계를 촬영했지만 그걸 바라보고 있으면 이게 사실 게임인지 구현된 그래픽인지 구분이 안 될 때가 있다고. 핵앤슬래시 게임처럼 쿼터뷰 시점을 쓴다든지, 카메라 무빙을 3차원 캐릭터를 바라보듯이 사용한다든지 했을 때 작동하는 문법 자체가, 관점 자체가 디지털의 관점으로 실제를 바라본다는 지점에서 디지털 네이티브라고 얘기할 수 있던 개념이 작동한다고 볼 수는 있다.

메타버스

U 근 몇 년간 모든 예산과 이슈를 독점했던 중심 기표였죠. 자멸한 듯 보이지만…

C 뭐 지금 키워드에는 없는데, 암호화폐에서 우리가 얘기하기로 한 NFT랑도 연결되다 보니 거의 한 쌍처럼 등장을 했어. 사실 이거는 정말 예술계 내부에서 논쟁화되고 담론화되어서 출현한 의제이기보다는 외부의 블록체인업계든 아니면 소셜네트워크든 어떤 자본과 어떤 정부의 방향성에 의해서 미술계 안으로 주입된 의제 같다는 생각이 다분하게 들어요. 왜냐면 우리가 보기에는 메타버스는 사실 아까도 디지털 네이티브 얘기 했지만, 우리는 이미 바람의 나라든 메이플 스토리든 롤플레잉 게임 안에서 충분히 서로의 역할을 분담하고 있었고,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고, 길드를 만들고, 서로 영토와 국가, 사회를 형성했던 사람들인데 이게 갑자기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인 것처럼 갑자기 조명됐다. 그리고 굉장히 신선한 것처럼 바람이 주입됐다. 이거 사실 코로나 시대가 만든 어떤 대체적인 산업의 하나의 일환으로서 외부에서 주입된 것은 아닐까 의심이 강하게 들죠.

비플의 히트도 크립토코인 플랫폼들이 자신들의 떡상을 위해 투척한 미끼라는 주장이 있었죠. 확실히 메타버스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보여진 것들은 뼈대밖에 없는 앙상함만 드러냈던 것 같아요. 달리 얘기해보면, 90년대에 미러 월드라는, 사실상 메타버스의 초안 개념이 제기됐었어요. 우리 세계를 모사한, 똑같은 디지털 트윈을 창조하고 현실 세계에선 선뜻 할 수 없는 모의실험을 거기서 수행하자는 거죠. 도시공학적인 예를 들면 여기다 도로를 하나 더 놓는다고 했을 때 트래픽이 어찌될 것인가 식의. 만약 거기에 AGI 이상의 인공지능들을 살아가게 하고 있었다면? 실험실과 관측자의 포지션이 합당하긴 한가? 넷 인권을 발명해야 하나? 그 세계에 대한 조작적 개입은 온당한가? 트윈과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구성하지? 세계만큼 커다란 질문들이 몰려오죠. 다시 메타버스로 돌아온다면, 하나의 유행어로 치부하긴 쉬워도 가상 세계는, 개작될 거에요.

C 이안 쳉 같은 작가나 아니면 박혜수 작가 같은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아. 적어도 이들은 그 안에서 어떤 사회적 실험들을 해보려고 했어요. 당장은 불가능한 사회적 시도가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를 실험하는 예술이지. 그 메타버스에서 부동산을 거래하는 게 이해가 가? 가상 세계 안에서 그림을 사고팔고 집을 마련하고. 우리가 보기에는 ‘이 메타버스에서 소유하는 것이 말이 되나?’라는 것도 의문이지만 그런 것들을 가지고 ‘여기서 누가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있나?’라는 의문점도 제기가 되잖아요. 그런데 사실 그런 문제는 현실에서도 그대로 대입 가능해. ‘누구의 생산물도 아닌 토지가 매매 대상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잊혀진 현실의 물음이 메타버스에서 파생된다니까? 메타버스 그 자체로는 매력은 없지만 일종의 사회 실험으로서 가치는 있어. 가설이라고 여겼던 사회 계약론이 메타버스에서 현시된다고.

U 근데 그거는 메타버스 자체의 매력은 아니고,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같아요. 그게 우리 사회를 원점에서 구상하게끔 하려 했다면 늦게나마 지지하고요. 커스터마이징 아바타나 강화아이템 현질은 자연스럽잖아요. 어스의 땅을 산다는 거는 무엇이든 사고팔 수 있는 자본주의 세계관 안에서 특별한 징후처럼 보이진 않아요. 논 그래픽 데이터베이스가 매매되고 있기도 하고요. 메타버스 전시도 꽤 많았었던 것 같아요. 가상 갤러리에서의 전시 경험은 대안적이라고 할 수 있었나요?

존나 불충분했지.

감각적인 측면에서?

C 감각적인 측면에서. 뷰잉 룸이 웹 페이지보다 나은 점은, 그 안에 큐레이션이 만든 동선이 존재하고, 그로써 큐레토리얼이 주조한 공간을 이해하게끔 만든다는 거지. 근데 그게 감상자한테 어떤 일관된 환경으로 다가오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이미지를 재현하는 품질이 좋은 모니터에서 고화질로 현상하는 방식보다 떨어져. 각 환경에 따라 보는 방식 자체가 너무 상이하게 틀어져버리니까, 결국 뷰잉 룸 자체의 한계보다는 매체의 불안정성 떄문에 의도가 전달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지. 근데 재밌는 점은 실제로 아트씨나 아트바젤에서 온라인 판매가 굉장히 큰 성공을 거뒀단 거야. 그들도 이렇게 고가의 작품이 인터넷 화면만 가지고 거래가 될지는 몰랐다고! 그런 측면에서는 비록 큐레이션이나 어떤 기획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데 뷰잉 룸이 유의미하지 않았지만, 미술시장을 원활하게 만드는 데에서는 성공했다. 그런 측면에서 메타버스는 더더욱 더 외부에서 유입된 게 맞다. 이렇게 얘기하면 좀 별로야?

U 동의해요. 앙리 마티스의 <춤>은 이전 시대의 작업들이 투사한 시점의 해체를 주장하잖아요. 그래서 그 크기는 선택적 필연이기도 하죠. 근데 책으로 처음 미술사를 배워 조그만 이미지로 접할 때는 감각을 못하죠. 큐레이션은 갤러리에서 벌어지는 물리학이자 관객을 상상하는 추리학인데요. 6인치 남짓의 핸드폰이나, 호환이 어긋난 기기들로 감동을 느끼기는 역시 어렵죠. 작품 외적인 것들의 1승?

이안 쳉 | 작가 인터뷰 | 《이안 쳉: 세계건설》 | 리움 – YouTube

암호화폐

U 동시대 미술 키워든데 왜 암호화폐라고 했는지 모르겠어. NFT면 NFT지. 이거 누가 한 거예요? 아이고, 아니다. 색출을 하려고 하면 안 되죠.

C 우리가 모두 인정하는 사실 중에 하나는 NFT가 장르로서 기능하지 않았다는 거잖아. NFT화된 작품을 거래하는 방식을 따랐을 뿐이지. 사실 그냥 흔한 디지털 이미지였고 무빙 이미지였단 말이지. NFT라는 매체를 통해서만 구현할 수 있는 시각화 방식이나 미학이 있었던 게 아니고, 그냥 NFT를 통해서 거래되기 때문에 NFT미술이라는 딱지가 붙었다고. 그렇다면 사실 NFT미술은 암호화폐 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지. 내 말은 NFT의 본질을 가리키는 단어가 암호화폐였다는 거지. 초기에 디지털 아티스트들이 NFT에 주목했던 건 적어도 그게 원본성을 입증한다는 측면이잖아. 이미지 자체는 아니지만, 연결된 태그나 영수증에 소유주가 누구인지 기입된다는 것. 그리고 그게 블록체인을 통해 모두에게 공유된다는 것도. 애초에 NFT라는 말 자체가 그냥 유일무이한 암호화폐를 가리키는 이름인 것이지. NFT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이나 체계 자체가 만들어진 게 아니야.

누구였죠? NFT아트도 만들고 실물도 만드는데 NFT가 팔려. 그럼 실물을 불태워요. 아니면 그냥 둘 다 주는 경우도 있었고. 저도 작년 전시에서 NFT를 함께 시도해보긴 했었는데 확실히 아직은 사람들이 실물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NFT가 하락하던 시점이기도 해서 단정은 못하겠네요. NFT는 에셋과 권리의 성격을 보여준 거 같아요. 그래서 그게 빠르게 소진되었다면, 미학적 가능성의 불모를 확인했기 때문이 아니라 신용이 빠르게 스쳐갔기 때문인 것 같아요. 한편, 그림을 매매하는 이유는 예술 자체의 가치 측정이 모호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프레임이 공간을 적게 차지하기 때문이기도 하잖아요. 제네바의 프리포드에선 작품이 빛을 보는 일 없이 컨테이너 안에서 소유권만 오다니고. 그래서 전 물질에서의 탈각이 앞서에 비춰볼 땐 타당할 수도 있겠다고도 생각했거든요.

C 제현 씨가 얘기한 대로 에셋의 한 형태로서의 시도라고 봐. 금본위제가 폐지가 된 다음, 화폐는 더 이상 실물 자산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어떤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잖아? 근데 그게 전부는 아니지. 사실 금으로서 보장되는 화폐의 가치는 없어졌지만, 그 자리를 보유한 자원이라든지 혹은 국력을 담보로 삼은 기축 통화 체제가 대신했어. 국가의 GDP 혹은 부 자체가 화폐의 가치를 담보하는 매개로 치환됐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화폐는 여전히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굉장히 물화된 매체로서 사용되고 있다고 얘기할 수도 있는 거야. NFT 혹은 암호화폐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났다고 생각해. 화폐가 디지털화되고 그로써 화폐는 더 이상 이제 신뢰 체계에 불과하거나, 물질을 얽매일 필요가 없다라는 인식으로 NFT가 출현했지만, 결국 다시 한 번 증명된 것은 화폐는 여전히 물질 체계라는 거야.

U 저는 화폐가 물질에 귀속되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신용카드만 봐도 화폐가치가 전산화되어 있고, 암호화폐나 NFT아트는 에셋의 성격을 가졌지 화폐로서는 아니니까. CBDC(중앙은행디지털화폐)를 봐도 점점 가상으로 가려고 하잖아요. 이제 진정으로 두려운 거는 현금이 보장한 도피가능성, 뭐 범죄 저지르고 도망가면 현금으로 도망가야 될 거 아니에요, 디지털 발자국을 남기면 안 되니까. 그러니 모든 교환이 추적될 수 있는 사회가 구현된다는 게 일면 공포잖아요.

실물에 달라붙어야 되는 게 당위가 아니라 현실을 반영했다고 생각해. 당연히 미래로 가면 갈수록 이게 당연히 이게 캐시화되고 도토리화되고 여러 가지 형태의 코인 형태들로 화폐가 지폐나 어떤 동전의 형태가 아니라 가상 형태로 바뀔 수 있지만 그것들의 가치를 보증하는 것은 여전히 물질일 것이라고 보는 거지. 저는 화폐 형태에 대해서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것들이 거래의 기능을 하기 위해서, 화폐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실물이 보증을 서야 된다, 실물이 담보가 돼야 된다고 보는 겁니다.

U 아. 화폐가 금태환이 아니더라도 여전히 실물에 대한 보증에 기대고 있다는 이야기군요.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 자체가 형상적인 것이 아니라 유물론적이라는 것이라고 얘기하잖아. 국가를 예로 들면서, 나라는 어떤 이데올로이면서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경찰과 학교, 교도소, 병원과 같은 장소, 물질적으로 산재되어 있는 국가장치로서 연결돼 있다고. 그러니까 국가장치로서 물리적으로 실재한다고 얘기하잖아요. 그런 개념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이제 암호화폐에 대해서는 그만하고.

Refik Anadol, <Unsupervised>, 2022, Media Wall.

GPT

U 요즘은 GPT 서문 쓰는 친구들도 많고, GPT랑 협업했다며 조형하는 친구들도 많아요. 나는 특정 매체 선점해서 작업 만들면 그 매체를 선취했다는 듯 행동하는 게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이건 인문학자들도 마찬가지에요. AI나 GPT 이슈 어떻게든 선점해서 그걸로 밥벌이하려고… 사실 이 대유행보다 1년도 더 이른 시기에 퐁에서 이계성 필자가 선구안을 보여줬거든요. 이 명석함을 꼭 밝히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C 일단 GPT의 완성도 자체가 그렇게 지금은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다고…, 얘기하면 안 되겠죠? 이게 우리 또 대중들이 쓰는 GPT가 있고 전문가들이 쓰는 GPT가 있으니까

U 파인튜닝 이야기군요. 얼마 전 구글 직원이 람다랑 대화했을 때도 AI가 자의식이 있다고 주장하더니 정신과 치료를 받잖아요. 완성도가 부족하다 식으로 치부할 수가 있는 건지 모르겠어.

일단은 뭐 당연히 제현 씨가 얘기한 대로 시기상조라고 얘기하는 부분들이 되게 의미 없다는 데는 동의해. 작년인가요? 2022년 11월 모마에서 열렸던 전시가 레픽 아나돌의 <Unsupervised>전, 우리말로는 ‘비지도’인데 13만 개의 작업을 데이터베이스화해서 알고리즘을 뽑아내고 그걸 반영해서 작업을 만들었다고. 물론 바우하우스도 그랬고 앤디 워홀도 어떤 지시나 명령을 통해서 팩토리에서 작품을 생산했지. 그런데 지금의 AI는 어떤 통제나 명령이나 지시 없이, 말 그대로 어떤 비지도 혹은 비통제를 통해서 스스로 작품을 생성해 나간다는 게 가장 중요한 논점이 될 거야. 인류는 기계가 마지막까지 손에 넣을 수 없는 부분이 창의성라고 생각했는데, 끝장 난거지. 인류의 자신감이 여지 없이 허구였다는 게 드러났죠.

일러스트 이미지의 경우는 처음 손가락을 제대로 현상하지 못했는데 몇 일만에 극복되더니 이제는 ai 이미지가 현실과 3초 정도는 혼동될 지경까지 왔어요. ai로 모션 그래픽 만든 거 보셨어요? 지금은 스톱모션 애니매이션처럼 보이는데 조금 더 있으면 초견만으론 실사랑 분간 못 할 것 같아요.

창의성 말고 인간의 본질이라고 여겨졌던 부분 중에 하나가 감성이야. 근데 이 감성도 사실은 인간이 학습한 것처럼, 기계도 머신 러닝을 통해서 익히는 게 가능해질 거라고 봐. 그게 실제로 가장 먼저 나타난 측면이 포르노라고 생각해요. 요즘 AI 이미지가 가장 대중적으로 활용되는 게 실사하고 가깝게 만들어진 야한 짤방들이잖아요. 그 야한 짤방들이 적어도 구현될 때 인간의 의도가 어느 정도 들어갔겠지만, 그걸 벗어나 인간의 어떤 오감을 자극하는 야한 구도나 어떤 의상, 어떤 포인트들이 등장을 하는 거잖아요. 그랬을 때 그 야함을 좀 더 철학적으로 환원해서 에로스적인 자극이라고 얘기했을 때, 그 에로스를 기계가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지. 그런 전제 하에 감정적인 측면들도 충분히 이미 AI의 능력 범주에 들어가 있다고 봐.

U 튜링 테스트나 중국인 방의 기출변형이네요.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간은 불완전성을 통해서 혹은 실패를 의도하는 우연의 미학을 통해서 예술성을 구축한다고 알려진 부분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지게 되는 거죠. 통제 불가능하고 불완전한 감정을 완전한 ai가 실현한다고 한다는 측면에서는.

U 하긴 초기 ai 이미지가 보여준 임팩트는 쩔었었죠. <석사 논문을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대학원생>이라고. 이거 완전 피카소의 수탉을 보는 것 같아.

석사 논문을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대학원생

게임

U 게임이 동시대적 키워드가 될 수 있을 거라….

C 아 그 질문 그만해! 너무 지겨워!

ㅋㅋㅋ 아 근데 검증을 하는 자리잖아요. 이거는 해야 되는 질문이야. 왜냐하면 동시대 미술의 큐레이터 35인이 각자 5개의 키워드를 제시해서 이것이 동시대 미술의 알짜다, 하고 말했는데. 검증제도 없이 굴러간다는 건 미술계의 굉장한 악습이고 적폐에요. 최소한 영화계에서는 리스트라도 만들어서 자기들끼리 치고받으면서 중첩되는 레이어를 통해 영화적 유산을 상상하려 했기라도 하지. 뭐 싸지르면 끝이야? 낳으면 끝이야? 애를 잘 키워야지!!! 지금 우린 애를 키우는 중이니까 이런 질문 몇 번 했다고 지루하고 그러면 안 돼요. 공동육아 해야죠.

C 자기 뺐다고 이러는 거야 아니야.

U 무슨 소리에요. 아무튼 제대로 된 응답들이 도착했는지 밀랍을 뜯어야죠. 기자로서. 이거는 아트인컬처에 제가 굉장한 기여를 하는 거죠.

C 예술의 게임성, 게임의 예술성으로 나눠볼 수 있지. 먼저 예술에 게임이라는 키워드가 들어올 때는 게임의 작동 혹은 조작 방식을 대입하는 작업을 예로 들 수 있어요. 이거는 과거 관객 참여 예술이 디지털 버전으로 치환됐다 볼 수도 있지. 그런 것들을 좀 잘 이용하는 작가가 아까 나왔던 이안 쳉이라든지, 국내 작가로는 김한샘 작가를 대표적이라 꼽을 수 있을 것 같아. 다음으로는 게임이 예술로 들어오는 경우를 얘기할 수 있겠지? 젤다의 전설처럼 게임에서 구현된 어떤 시각적인 아름다움들, 그리고 하나의 세계관을 창조하는 지점들, 그 안에서 각 캐릭터가 갖고 있는 예술적 사실, 서사들이 지닌 어떤 아름다움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이런 두 측면이 동시대미술의 의제로 게임을 다룰 때 나올 수 있는 얘기가 되겠지.

U 저는 작가 중에선 정성진 조각가 실천이 좋아요. 여건 상 큰 작업실을 가질 수 없는 터라, 모듈형 조각을 만들어 조립하는 방식을 떠올렸다고 하더라고요? 공간 형에서 ⟪dock⟫이라는 개인전이 있었는데, 각 파츠가 인벤토리에서 출납되어 현전한 것처럼 여겨져서 재밌었어요. 게임의 위상이 굉장히 빠른 시간 안에 전환된 것 같아요. 20세기에 한국이 만화를 억압했다면 21세기엔 게임을 억압했는데. 게임 제너레이션도 비평적으로 약진을 하고 있고요. 미술 비평보다 오히려 게임 비평이 더 매체에 대한 집중을 많이 하는 경향도 보이거든요. 몰입에 있어서도 영화보다 게임이 유리한 것 같아요. 영화의 두 시간은 좀 인위적인 느낌이 됐어요. <사탄 탱고> 이런 건 이제 맨 정신으로는 못 보죠. 영화가 사람들을 즐겁게 해야 된다는 건 아니고요. 꿈이나 자궁처럼 은유되었던 공간과 매체의 퇴색을 경험하고 있다는 거죠.

정성진, <횡단열차 – 개척의 쇄빙선>, 2022, 혼합재료.

영화는 아무리 우리가 몰입해서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그 스크린 앞에서 늘 타자일 수밖에 없잖아. 반대로 게임에서는 몰입이 주체가 되는 방식으로 구현된다는 지점들이 좀 다르게 느껴지는 것 같고. 그렇기 때문에 요즘에는 ‘치트키가 신용카드다’ 이런 말이 있는 것처럼 자신의 어떤 능력을 그 안에서 키우려고 하고 자아 실현을 하려고 하니까. 게임에서 자아실현을 한다고요. 성주가 되고 길마가 되고.

U 그건 자아실현이라기보다는 돈을 벌고 싶은 거죠. 그냥 작업장을 찾는 거죠.

C 진짜 진짜 어떤 본질적인 자아실현은 아니라는 거에 대해 동의해. 근데 대리적인 자아실현을 하지. 폭력성이라든지 소유욕이라든지 현실에서 얻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충족을 게임 안에서 얻을 수 있잖아. 뭐 그런 말 하는 거 있잖아요. 현실에서는 노력하면 안 되지만 게임에서 노력하면 된다고. 레벨은 올라가니까.

U 흐음. 하긴 우리 모두 범죄를 사랑하죠. 느와르 영화의 범벅도 그렇고. 게이미피케이션 요소가 동시대 미술에 지속적으로 삽입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최근에 국현에서도 게임에 관한 전시가 열렸고, 그러고보면 문화적 위계가 사라지는 시간대를 체험중이네요. 하위문화라는 지칭 자체가 넌센스가 된 것 같아. 이전엔 고급문화가 하위문화를 수용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외려 고급문화가 하위문화로 말미암아 연명할 수 있는 느낌이에요.

C 아까 네오-버내큘러랑도 연결될 수가 있는데 보통 게임의 예술성이라고 얘기하면 그 안에서 펼쳐진 시각적 아름다움에 대해서 얘기를 많이 하잖아요. 그래픽의 훌륭함이라든지 어떤 풍경의 재현이라든지 혹은 훌륭한 물리 엔진을 통해서 가까지 벌어지는 어떤 스펙타클한 상황 같은 것들 이런 거. 근데 신기하거나 좀 재밌다고 생각하는 지점은 게임에선 그렇게 재현에 충실한 방식으로 예술성들을 구가한다고 하는데, 정작 예술에 게임이 들어올 때는 아까 김한샘의 어떤 픽셀 작업이라든지, 이안 쳉 같은 경우에도 굉장히 사실 그게 훌륭한 그래픽이라고 볼 수 없는 카툰 랜더링이라는 게 앞세워진단 말이야. 좀 간소한 그래픽을 가지고 막 깨지고 뭉개지고 막 뒤섞이고 하는 것들을 통해서 예술성을 풀잖아요. 시각적인 미감을 가지고 푸는 게 아니라. 그래서 범주에 따라 추구하는 미감 자체가 서로 다르다는 것도 좀 재밌게 지켜볼 수 있는 지점 같아요.

처음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에 시동을 걸었을 때가 생각나요. 동굴에서 나온 링크의 스타팅 포인트가 고지대라서, 절벽에 이르면 하이랄 평원의 파노라마가 밀려오거든요. 그 감탄은 기술에 대한 감탄, 인간의 공간적 상상력에 대한 감탄, 육박하는 자연에 대한 감탄 등 모든 게 섞여있어서 형언하기 어렵죠. 숭고가 자연의 부피에 대한 시각적 충격에 그치지 않고 신의 섭리에 대한 감탄과 유한자의 무한계의 대립에 기인한 공포까지 겸하듯이요. 말하셨던 대로 글리치는 주요한 탐구 영역인데, 예술가들만의 반찬은 아닌 것 같아요. 게임을 즐기는 방법 중 하나로 스피드런이 있는데요. 게임 세계의 풍부함에 아랑곳하지 않고 최단시간 안에 엔딩을 보는 타임어택 문화에요. 이걸 위해서 수없이 많은 글리치들을 발굴하고 이용해야 하죠. 글리치 자체를 커맨드화해서 게임을 변칙적으로 즐기는 경우도 많고요. 그래도 게임 플레이어들이 글리치의 효과에만 집중한다면, 예술가들은 균열 자체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호감이 가네요.

김한샘, <LIGHTNING ROD>, 2018, 비디오게임. (출처: 경기도미술관 보도자료)

숏폼

C 원본의 어떤 정상적인 길이에서 벗어나서 굉장히 짧게 축약되고 흔히 하이라이트나 엑기스라고 부르는 요약된 콘텐츠를 중심으로 매체를 소비하는 방식. 이 정도로 규정하고 시작하자.

U 확실히 인간한테 24시간은 너무 촉박해진 것 같아. 갤러리 안에서도 이런 경향은 있어요. 영상 긴 거 안보거나 못 보잖아요. 이번 광주비엔날레에서도 영상 작업들이 다 짧더라고요.

C 저는 옛날부터 못 봤어요. 전시장과 극장에서의 영상은 다르게 구동되잖아요? 고정되지 않고 자유롭게 내가 돌아다닐 수 있는 환경에서 언제든지 이 영상을 외면하고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거나 혹은 몰입하지 않은 환경에서 떠들면서 지켜본다거나 하는 식의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영상을 관람할 수 있는 게 전시장의 포맷이었다면, 극장의 포맷은 이 모든 게 허락되지 않고 무조건 고정되고 지정된 좌석에 앉아서 지켜봐야 해.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전시장에서 갖고 있는 미디어예술의 특징 중 하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람하게끔 만드는 것보다. 오히려 중간 중간 부분을 살핀다고 하더라도, 그 영상이 전체를 가늠하게끔 하는 게 미술에서의 암묵적인 영상 작업 룰이라고 할 수도 있었고.

U 몇 초만의 이미지로 관객을 사로잡아서 발길을 붙잡고 거기다 앉혀놔서 끝까지 계속 보도록 하겠냐는 어떤 카리스마가 있어야 되는데 매 시퀀스가 그럴 수는 없잖아요. 그건 속세가 훨씬 잘하는 일이기도 하고.

C 그러니까 그 시퀀스를 모든 프레임의 품질로서 보증한다기보다는 그것들을 각오하는 작업들이 전시장에 있었다고 얘기할 수 있겠지. 그걸 각오하지 않는 작업이거나 그런 환경과는 다른 효과를 내기 위해서 영화관에서 혹은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고.

U 다시 숏폼 얘기로 돌아간다면, 저는 이거 동시대 미술의 키워드라는 설득력 있는 것 같아요. 납득할 수 있겠어요. 긴 플레이타임의 작업을 만드는 게 요즘 지각에 대한, 또는 대세 매체들에 대한 잔존저항처럼 여겨지잖아요.

C 숏폼하니까 음악이 생각나네. 최근 케이팝은 점점점점 음악의 길이가 짧아지고 있다니까? 라떼는 4분, 5분 넘어가던 음악도 존재했는데 요즘엔 웬만하면 다 3분대에서 끝나고. 안무는 사람들이 챌린지를 찍도록 굉장히 간소화되는 경향이 있어. 그런다고 내가 따라할 수는 없지만…. 숏폼을 노리고서 나오는 거지. 근데 이걸 미술에 적용한다면, 미술의 숏폼은 제현 씨가 얘기대로 영상 길이가 짧아지는 것도 있지만, 그보단 인스타그램의 포스트라고 생각해요. 전시장에 직접 가는 게 아니라, 일단 그 전시가 좋은지 아닌지가 1차적으로 인스타그램 포스팅에서 평가가 되잖아. 숏폼에 최적화된 음악이 생산되는 것처럼, 인스타그램에서 볼 때 색감 쨍하게 나오고, 핸드폰 액정에서 작은 사진으로 보았을 때 미감적으로 훌륭하게 나오는 어떤 구도 자체가 되도록 처음부터 거기에 끼어맞춰진 형식의 작업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거지.

U 이 말 재밌네! 김민희 작가 같은 경우도 실물로 보면 진짜 구리거든요. 근데 카메라로 찍으면 외려 상이 선명해지고 괜찮게 보여요. 아즈마 히로키가 선취한 이야기들 같네요. 원작이 애초에 2차 창작을 염두에 둔 채 만들어지듯, 숏폼을 상정한 아이돌 안무가 제작되고, 카메라를 의식한 작업들이 만들어지는…

C 디테일한 이미지보다는 추상화된 이미지 혹은 애니메이션하고 거의 흡사할 정도로 데포르메가 굉장히 많이 가미된 이미지. 그래서 이것들이 확대됐을 때 오히려 조금 불투명하고 불완전해 보이지만 인스타그램과 같은 좁은 화면 디스플레이에 들어갔을 때는 굉장히 완성도 있어 보이게끔 느껴지게 하는 이미지들이 좀 득세하는 것도 전시장 자체를 숏폼화하는 거죠. 아무튼 근데 사실 그러면서 디지털 이미지 득세하면서 가장 피 본 장르 중에 하나가 나는 조각이라고 생각해요.

조각이 대세가 됐는데 왜 피를 봐요, 조각이.

디지털 이미지화됐을 때 조각과 회화는 더 이상 구분되지 않잖아요.

U 2차원으로 상맺는 눈이 4차원 시간을 이용해 3차원을 인식하게 하잖아요. 그러니 회화가 스크린에 쉽게 수렴되고 안착하는 것과 달리 조각은 약간의 저항감이 있죠. 그렇다면 오히려 조각이 숏폼에 저항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C 조각이 가장 물성 가득한 장르라는 지점에서 디지털 이미지와 대척점이 있다고 얘기할 수 있지만, 동시에 디지털 이미지가 가장 득세하는 현실에서는 조각은 그 유행을 따라가기 힘들다는 거죠. 숏폼화되기 가장 어려운 장르라는 거죠.

U 우리 너무 멋있는 말을 찾았어. 그럼 이렇게 하죠. 조각은 숏폼에 대한 미학적 반동이다. 마치 달의 뒷면 같다. 보이는 만큼 보이지 않는 부분을 생산하며, 이 비가시성은 이미지의 수렵을 통해 산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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