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연×엄제현의 티티카카 [3]친환경, 매체

조재연, 엄제현

자연, 전시의 환경 윤리

엄제현(이하 U): 세 번째 만남이군요.

조재연(이하 C): 난 오늘이 마지막인 줄 알았어.

U 그러니까. 뭔가 많이 달려온 느낌이야. 자네가 자꾸 약속 펑크해서 그래요. 미루고 뭐 하고 막 이래서. 회사 때문이죠? 제가 자네 대표랑 정상회담 좀 할게요. 자네 내일부터 퐁으로 출근시키겠다고.

C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라고 하고 싶은데 제게 가오가 있을까요…

U 오늘 보여주세요. 친환경 차례에요. 탈인간 중심주의, 비인간은 포스트 휴먼 얘기할 때 언뜻 얘기해서 넘어가도 될 것 같아요. 엄밀히 따지면 응당 다르지만, 또 비중 있게 얘기하자니 피로감이 있네요.

C 넘어가도 됩니다. 아니면 우리가 뭐 놓친 키워드가 있나? 감각의 회복, 공생, 허비, 행성적 비전… 없네.

U 자연, 전시의 환경 윤리, 기후 위기만 얘기하자. 최근 미술계의 핫 감자들이죠.

지난 5월 아르코미술관에서 ‘지속 가능한 미술관 운영을 위한 운영 지침’을 발표했어요. 2022년부터 국제근현대미술관위원회(CIMAM)에서 지속 가능한 미술관의 전략은 무엇인지 매뉴얼을 개발하고 다른 미술관에 그것을 적용하게끔 만드는 협약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데, 여기에 아르코미술관이 동참하고 국내에서 친환경적인 전시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발표한 거죠. 전시 기간을 3개월 이상 장시간 운영해서 전시 철수랑 설치 빈도를 줄인다거나 친환경 재료의 사용, 가벽과 진열장 최소화 혹은 재활용 같은 이야기가 주를 이뤄요. 단순히 이런 매뉴얼만 나왔으면 조금 식상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런 매뉴얼을 지킨 어떤 모범 사례라고 볼 수 있는 전시도 함께 공표를 했어요. 대표적으로 정재철 작가의 <블루오션 프로젝트>가 들어갔고요. 그런데 이 자체에 특별한 새로운 논의점이 존재한다기보다는 기존에도 어떤 친환경에 관한 문제들은 미술 안팎에서 계속해서 제기가 되어 있었잖아요? 그 와중에 오늘날 기후 위기나 전염병이 대두되다 보니까 더욱 능동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방식으로 미술관 운영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겠죠.

U 오염은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지만 더 정확히는 우리가 알고 있던 자연에 대한 관념의 훼손이잖아요. 자연은 정적인 대상이 아니니까요. 환경을 존속하려는 비전은 20세기에도 너무너무 많았어요. 주장은 있었지만 중심은 아니었던 거죠. 근데 이젠 중심처럼 기능해요. 하지만 왜 하필. 왜 지금? 왜 환경 이슈가 담론적 우세종처럼 나타날까? 한다면 전 예술 형식의 내적인 파괴로 인해 어떤 내재적 출구전략도 없다는 상황에 기인한다고 봐요. 이제 뭐 형식을 탐구하겠어요, 뭘 하겠어요. 진공상태의 미술관은 오만가지를 다해요. 음악도 하고, 영화도 틀고. 국현에선 게임 전시도 하고 있죠.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이 차례로 쓸고 지나간 후 우리는 예술의 종별성을 수립할 만한 유효한 담론적 건축에 실패했어요. 솔직히 우리가 진짜 의미 있는 일을 하면 자원에 대해서 그렇게 인색하지 않아도 돼요. 근데 쓰레기 같은 일을 하고 있다면 쓰레기라도 아껴야 돼요.

C !!!

U 이번에 왜 용인에다 반도체 클러스터 만든다면서 정부가 300조 투입을 공표하잖아요.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그런 걸 하지 말아야 된다. 낭비다. 그런 말 못 하거든요. 암묵적으로 반도체 수출이 작금의 지속과 연동되어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일 거에요. 예술특구를 만드는데 300조를 써야 한다? 난리가 나겠죠. 어느새부턴가 미술관이 이데올로기의 하수인으로서의 자기를 잘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돼. 과거엔 예술가들이 여기서부터 출발하자, 하는 식의 외침을 날릴 수가 있었는데 이젠 스스로의 상징적 역할에 대해서 입 닫고 동조하는 것 같아. 탄소를 줄이고, 교육을 하는 공간으로 탈색되는 걸 보면서 뭘 위해?라고 묻지 않을 수가 없어요. 아워레이보가 ⟪래콜렉티브: 25개의 방⟫에서 우리의 죄는 너무 많은 작업을 한 것이다,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신 것이다. 하면서 똥꼬쑈 하는 걸 본 적 있어요. 부산에서도 가벽 뒤편에 전시를 만드느라 나온 쓰레기를 집적해 놓고 표기해 놨더라고요. 이때 죄책감이나 쓰레기까지 남김없이 효율화 공정을 거쳐 스펙터클로 만드는 일은 얼마나 윤리적인가 싶어요. 이건 윤리라기보단 경제죠. 겉보기엔 친환경인데, 막상 뚜껑 까보면 보이는 건 효율성의 우주에요.

C ‘윤리’라는 낱말은 제현 씨가 말한 것처럼 미술 안에서 그 의미가 굉장히 축소된 상태로 드러나요. 이때의 윤리는 선과 악을 구분하거나 혹은 악한 것을 제거하자는 외부에 대한 대항적인 이야기이기보다, 행동에 대한 성찰, 즉 내적인 조정을 요청하죠. 이러한 윤리는 사회적이기보다는 개인의 라이프 스타일로 환원돼요. 당연히 미술 생산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줄이고, 그 안에 쓰일 에너지를 절약하는 것은 중요해요. 이게 다 쓸모없는 일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어요. 근데요, 기후 위기를 막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상상하는 일은 지금 통용되는 ‘윤리’란 이름으로는 불가능해요. 자본의 논리는 맹목적인 착취와 자연 파괴를 통해서만 생존할 수 있어요. 그러나 지금의 윤리는 모두에게 은밀한 죄책감을 심어놓은 채로,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소박한 실천을 가지고 도덕을 즐기거나 자위하게 만들 뿐이에요. 제발 지구를 죽이지 말자고 얹어주는 가이드라인이 윤리가 될 수는 없어요. 그렇게 미술이 친환경을 향해야 한다면 어째서 자본에 대해선 말하지 않나요? 어째서 자본과 싸우자고 하지 않죠? 노동 해방 없는 자연 해방, 자본주의 철폐 없는 기후위기 극복은 불가능한 걸요.

U 옳소! 모든 것이 가성비의 진공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 미술관은 미적인 경험을 위한 장소지, 쓰레기를 절감하는 장소가 아니에요. 미적인 경험에 대한 항거불능의 선언이 가능하지 않은 만큼, 선뜻 반대를 낳기 힘든 주장으로 모여들겠죠. 이런 거 누가 거부해요. 적을 만들지 않는 적대로 스스로를 프레이밍 하기는 너무 쉽고, 또 너무 많아서 미치도록 의심스러울 지경이에요. 성평등 누가 거부할 수 있으며, 환경윤리 누가 거부할 수 있겠어요? 그게 진보적인 활동의 전부인 냥 구는 건 자칭 진보주의자로 충만한 씬에 1의 마찰도 없이 유합되는 백 점짜리 나이스한 좌파의 길이죠. 사상이 통행료나 여권인 것처럼, 동족을 식별할 인종학적 코드처럼 기능해요. 그런 코드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만 네트워킹하고 확증 편향의 길로 빠지고.

C 자연을 주제로 선택해서 메시지를 던지는 건 좋아요. 근데 그게 과거의 야투, 자연미술, 대지미술에서 제시했던 주제하고 크게 다른지는 모르겠어요. 차라리 그들은 적어도 그 시대에서 유효했다고 생각해요. 노마드를 추종하면서 자연에서 작업물을 생산하고 거기서 사라지고 마는 것을 통해 미학적 결과를 만들었다고요. 자본이 없는 세계를 꿈꾸고, 자본이 생산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고, 자본에 입각한 정주가 아닌 유목으로서의 삶을 보여주었고, 이 모습들은 분명 자본과 불화하는 존재의 양식이었죠. 그러나 지금은 같은 주제를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의 공격성이 있는지 혹은 그 정도의 미학적인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긍정하지 못하겠어요.

U 외부는 없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확실히 경계에 대한 어떤 형식적 갱신 같은 게 이제 없다고 느껴지는 게, 모든 실천들이 화이트 큐브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 같아요. 볼거리로 축소되고 있는 예술 자체에서 느껴지는 수상함? 작가들이 예술의 전위성을 밀어붙이거나 상상하기는 희박하고, 현실 정치의 발언이 아니더라도 미학사 안에서 자기가 응답할 수 있는 어떤 전복적 제스처들을 소실하고 있고 계보와 네트워킹의 확장만 무목적적으로 거듭되는 것 같아요. 이건 제 일방적인 투덜거림일 수도 있어요. 미술사는 대화이기도 하니까, 계보의 생산을 마냥 손쉬운 편입이라며 격하할 순 없죠. 그렇지만 특정 작업을 기각하는 방향의 대립적 계보를 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에요. 도저히 같은 자리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작업들이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같이 두면 금방이라도 살인이 날 것 같아서 말이에요. 자연에 대해서도 그런 작업은 있으리라 기대해요. 친환경 이슈는 다만… 냄새가 좀 나죠.

C 사실 유니클로, 스파오 이런 데 가면 친환경적인 재료, 리사이클링 천으로 만든 옷 그리고 그걸 사면 소외 계층에 기부가 된다라고 했을 때와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생산한 전시나 미술품이 크게 다른 지점이 있어 보이지 않아요. 친환경이 세일즈 포인트가 된 것처럼 미술에도 그런 바람이 부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는 거죠.

U 그러게요. 이걸 사라. 넌 도덕적 소비자다. 미술관에 가라, 넌 친환경 작업을 보고 탄소중립 교육을 받아 표백된 녹색 인간이 될 것이다? 다이어트가 대세가 된 세상에서 예술도 다이어트를 하는 건가. 제로코크랑 뭐가 다른가요? 제로예술 시대… 심각하다!

《래콜렉티브: 25개의 방》, OUR LABOUR, 2022, 신사하우스. 출처: our-labour.com

기후위기

C 기후 위기하고 직결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환경에 대한 전방위적인 문제의식으로서 코로나19를 바라볼 수 있죠. 이 3년간 공백기 동안 자신의 작업 세계가 많이 변했다고 얘기하는 작가가 대다수거든요. 사소하게는 고독감을 주제로 삼는 작가가 있을 수 있고, 인명이 사라진 풍경으로 이 시국을 표현하는 작가도 있었죠. 그러나 제일 크게 다가왔던 것 중에 하나는 코로나19에 대응하는 차원으로서 국가 권력의 존재감이 커졌다는 거에요. 특히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상업 시설을 폐쇄시켰던 게 대표적이죠. 정치와 경제가 불가침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거나 혹은 경제가 정치를 컨트롤하는 시대라고 생각했던 것이, 정치가 다시 경제를 압도하는 식의 증상을 보게 되었어요. 그 안에서 사고하는 방식이 변화했고, 이를 통해 정치적 메시지를 내놓는 작가들이 있었죠. 코로나19 당시 집합 금지 명령으로 경제를 선별적으로 지배했던 정치권력과, 그 권력이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현실을 표현한 김영규가 대표적이었죠. 이런 걸 보면 기후 위기가 환경 이야기로 국한되기보다 권력에 대한 사고를 재고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동시대 미술의 키워드로서 작용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런 위기가 자본주의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기도 해요. 니체가 말했던가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더 강하게 해 줄 뿐이다’ 자본주의는 위기를 매번 극복할 거고, 그로부터 우리가 느끼는 건 미래는 없다는 증거뿐이죠.

U 우파변증법에 힘이 없었다면 지금 이런 세상이 오지 않았겠죠. 가속주의적 관점이 괜히 나온 건 아닌 것 같아요. 보니까 사람이 약해질수록 기술을 요해요. 보건복지부에서 하는 사업 중엔 이런 게 있어요. 독거노인들 집 방에 센서 같은 것을 붙여놔요. 만약에 화장실에 몇 시간 이상 머물러 있다? 그럼 신호가 울려서 직원들이 확인할 수 있어요. 이게 공적 예산으로 시행되는 중이에요. 전 AI비서 시스템을 이런 독거노인 분들이나 장애인의 일상생활능력 향상을 위해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보는 쪽이에요. 가장 좋은 건 독거노인이라는 개념이 소멸한 사회구성체를 만들어내는 데 있겠지만… 이은희의 <머신 돈 다이> 마지막 숏이 생각나.(상 주고 싶은 작업이에요) 폐기물의 100% 재활용이 가능한 단계에 도달해서 매연, 플라스틱, 녹조, 탄소 등을 막론하고 싸그리 재활성화할 수 있어서 문명 레벨을 행성 지배의 단계까지 도약시키면 다른 방식의 사유가 발명되겠죠.

C 너무 나쁜 얘기만 하는 것 같아서 조금 긍정적인 얘기를 해보죠. 하이데거식으로 말하면 ‘세계를 바꾸려면’이라는 화두에서 사실 먼저 선결되어야 되는 조건은 ‘세계가 있다’라는 것이에요. 세계를 변화시키려면 우리가 세계라고 말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세계가 있어야 하고, 그때의 세계는 우리 모두가 존재하는 어떤 공동의 지평이에요. 각자 파편화된 개별자의 세계, 혹은 늘 끊임없이 바뀌기 때문에 감지할 수 없는 세계, 이런 장소에서는 어떤 공통된 의제를 가지고 무언가 변혁하려는 시도가 불가능해요. 다시 하이데거식으로 말하면 ‘존재’가 오늘 주어진 조건에서 벗어나 진보하는 것일 때, 우리는 존재자는 있지만 존재란 부재하는 세계에 놓인 것이죠. 기타노 다케시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로 일본인의 사고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어요. 우리에게 그 같은 사건은 세월호 참사죠. 우리는 세월호 이후로 적어도 재난에 대한 공통적인 사유 방식을 갖게 되었으니까요. 기후 위기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우리는 지구의 문제를 일부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고, 모두의 공통적인 문제로 인식하게 되었어요. 세계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요. 여기서 출발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만약에 조금 더 좀 전위적인 혹은 대항적인 미술을 기대를 한다면요.

U 듣고 보니 그렇네요. 사실 대중들이 계급적으로 사고하기도 쉽지 않게 되었죠. 사회적 활동 형태를 통해 구분하기보단, 소유의 양적 차이로 서로를 식별하니까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절대적인 관념이 되었기 때문에 나오는 계급적 사유의 역설 같아요. 너 노동자야? 라는 물음엔 분별력이 얕고, 너 얼마 있는데? 하고 셈하죠. 동일성에 대한 (피상적)차이의 승리같기도 하네요. 계급을 통해서 집단-우리를 구성해 내긴 난해한데, 기후위기는 공동의 문제를 야기시킬 비전처럼 보이죠. 환경도 계급에 따라 대출상품처럼 차별적으로 적용되지만요. 그래도 공동의 지평을 상상할 수 있다는 건 좋은 것 같네요. 이전까지의 예술이 통용되지 않는다면, 지금 같은 상황을 전선으로 삼은 예술을 마냥 그린워싱이라고 매도해선 안 되겠죠. 우리가 친환경에 비평적이라 해서 보수적 예술지상주의자가 아니듯 말이에요.

C 그래서 좌파들아 이 얘기를 듣는다면 이 깔때기를 자본주의 철폐에다 들이밀자. 그냥 환경, 지속 가능한 전시 이딴 거 하지 말고, 제로코크 이런 거 하지말고, 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열심히 깔대기를 대보자. 막 이래.

U ㅋㅋㅋ 한편으론 이것도 재밌어요. 기후 위기에 대해서 이렇게 경각심을 알리려고 테러를 하는 위치도 갤러리야. 공장으로 달려가지 않고 볼거리를 망쳐놓는 식으로 개입하잖아.

C 하등 쓸모없는 예술은 보호하지만, 우리가 살 터전인 지구는 왜 보호하려고 하지 않는가. 이런 메시지였죠. 뼈 아픈 얘기 아니에요?

U 그건 환경을 생각하는 분들이 하셨고, 그럼 예술가들이 할 수 있는 테러는 뭐가 있을까요.

C 없어. 예술가들 X밥이라고 쓰세요. 사실 그 테러라고 해서 생각난 건데, 주제에서 벗어난 말이지만 예술가가 파업한다고 세상에 뭐가 멈추는 게 뭐가 있을까요. 아무것도 안 멈추잖아요.

U 그렇죠. 예술도 노동이냐는 논쟁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사실 우스운 얘기죠. 일 터지면 경중을 따져보기도 전에 예술계에서 삭제시켜 버리잖아요. 바로 실업자 만들어버려. 그것도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아가는 법 그런 거 없어. 근대 사법이 처벌에서 교화로 넘어갔어도 여긴 봉건제처럼 돌아가고 있으니 별나라 얘기죠. 타인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견딜 필요도 못 느끼는 거고, 견딜 인내심들도 없는 거죠. 그들의 행동 양식이 애초에 예술은 배부른 활동이라고 증거하는 셈이에요. 예술이 공기처럼 절대로 삶에서 뗄 수 없는 거라고 그들 스스로가 느낀다면 이렇게 행동 못하죠. 예술의욕이라 부르며 예술을 본성적 욕구의 영역으로까지 격상시켰던 알로이스 리글이 보면 통탄할 일이에요. 한편, 예술에 대한 이 지독한 무력감을 겪다가도 설마? 혹시? 하는 마음으로 예술 전체가 유구하게 떠받쳐지고 있다는 사실은 자못 흥미로워요. 마스터피스의 교환가치에서 답을 찾으면 쉬운데, 아무도 그렇게 안 하고 고뇌한다는 건 멋진 일!

<머신 돈 다이>, 이은희, 2022, 한 장면.

리얼리즘, 초현실주의, 형식주의

U 살짝 양아치처럼 가는 감이 있는데 이제 매체로 들어갑시다.

C 너무 다 했던 얘기야.

U 맞아요. 그리고 제가 봤을 때는 리얼리즘(이라고 키워드 내놓은 사람) 호되게 혼나야 돼요. 키워드로 제시하는 형식이었는데 리얼리즘, 초현실주의, 형식주의… 이거 너무 성의 없는 대답 아니에요? 미술 안에서 리얼리즘이라는 게 19세기부터 본격화되었던 문제고 초현실주의는 20세기 초에 절정에 이르렀고, 형식주의는 그린버그 때 전성기를 맞았던 개념들인데 그거를 동시대 미술의 키워드라고 떡하니 내놓으면 안 되죠. 하려면 다른 형식일 때 냈어야죠. 각각의 개념이 어떤 역사적 계보에 의해 상이하게 맥락화되는지 따져봐야 하니까 비평이나 논문 폼에서나 이런 걸 제시했어야죠. 논증의 영역이기도 하니까요.

그렇죠.

한편, 이번 아트인컬처 6월 호에서 이런 글을 봤어요. 윤원화 씨가 한 말인데 초현실주의가 당대에 등판하는 게 “그만큼 현실이 불확실하고 믿을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래요. 이건 초현실주의를 초역사화하는 주장이기도 하죠. 20세기 이후로 안 그런 시대가 우리한테 있었나요? 이런 사고는 여전히 억압과 귀환이라는 포맷을 요청해요. 그렇다면 미술이 여전히 문화적 지층에서 증상의 위치를 담보하고 있어야 해요. “왜 하필 지금?”이냐고 형식을 탐정의 눈으로 추론하는 일이 가능해야 하죠. 근데 지금은 특정 사조의 범람이 증상처럼 여겨질 수 있느냐부터 논해야 해요. 초현실주의 화풍이 과연 작가의 개취일까요, 역사적 귀환일까요? 키워드들의 핍진성은 그래서 부정. 계보학적으로 타당하게 구성해서 제시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억압과 귀환이라는 테마 안에서 이를 옹호하는 일도 다분히 자의적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논법 안에서 진위 판별은 절대 내릴 수가 없다. 주장만 있을 뿐.

C 굳이 20세기와 21세기의 차이점을 논해야 한다면, 20세기의 리얼리즘과 초현실주의는 기투(企投, project)로서 등장했다고 생각해요. 현재와 불화하며 미래로 자신을 내던지는 실존의 방식이요. 그러니까 초현실주의가 주어진 오늘을 그대로 인정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부정하고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야 된다고 말할 때, 장르는 그 자체로 대항적인 제스처였어요. ‘상상’이 지금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사유일 때, 그게 현실에 대한 불충분을 지반으로 삼듯이요. 리얼리즘 역시 사실이 아니라 진실을 소환하는 데 의의가 있었죠.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곳의 배면에 소외된 존재와 모순 사이에 진실이 있으며 그것을 발굴해 내야 한다는 정치적 선언이었다고요. 그러나 최근 리얼리즘과 초현실주의의 재소환은 피투(彼投, thrownness)에 가까워요. 여기엔 수동적인 의미로써 혹은 이곳에 남은 것이 불가능밖에 없다는 듯이 패배의 맥락에서 머물르고 그쳐요. 초현실은 현실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도피이고, 리얼리즘은 (예술이 도달할) 사실에 대한 재현 불가능성에 대한 인정이죠.

 당신이 말한 기투랑 조응하는 어떤 형식이 있었다면 마니페스토였겠죠. 큐비즘으로 봐야 대상을 볼 수 있다던가, 초현실주의로 봐야 된다든가, 뭐 기하학으로 봐야지 우리가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느니 하는 입장들의 난무가 있었고, 그때 작품은 자기를 진리로서 내세우려고 했어요. 지금 우리한텐 사조들이 스타일일 뿐이죠.

C 아트인컬처 6월호에 서동진 교수가 《히스테리아: 동시대 리얼리즘 회화》전에 대해 기고한 비평에 동의해요. 리얼리즘은 제현 씨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존재하지 않아요. 외려 거기에 진실이 담겨 있다면 공동의 지평으로서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진실을 재현하는 예술은 결국 실패할 것이란 예감이죠. 공동의 지평이 존재하지 않으니 리얼리즘은 결국 다양한 세계를 빚어내요. 마치 마블 영화의 멀티버스처럼요. 이런 세계도 존재하고, 저런 세계도 존재하고,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세계가 범람하는 거죠. 거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각자의 세계를 존중하는 다원주의적 윤리에요.

U 리얼리즘은 보리스 그로이스 선생께서 또 재밌게 얘기하셨죠. 그냥 인용으로 갈음할게요. “현실에 대한 불만은, 폭력 시위나 혁명적 행위를 통해 불만을 표명하지 않는 한 감춰져 있으며, 그렇기에 허구적이라는 혐의를 늘 받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내 직업을 싫어하면서도 그 일을 계속한다면 내 존재가 처한 현실에 대한 불만을 객관적 근거를 들어 증명할 수 있는 가능성이란 없다. 이러한 불만은 ‘허구적’인 채로 남는 것이다. 이처럼 허구로 남겨진 불만은, 기존에 허구적인 것의 영역으로 간주되어 온 문학이나 예술에서는 표현될 수 있지만, 진지한 과학적 연구 주제는 될 수 없다.”[1] 당신 말대로 사람 수만큼 다양한 리얼리즘이 잠재적으로 우글대고 있다면, 그건 또다른 흥미이자 공포네요. 앞서 의심한 억압과 귀환의 맥락에 다시금 증좌를 부여하니까요. 그러면 세 가지 키워드는 이렇게 걷어내고.

<절망하는 남자>, 귀스타브 쿠르베, 1843-45.

추상

U 제리 살츠가 그랬죠. “왜 시발 이렇게 많은 추상화들이 다 똑같이 보이지?” 추상은 표현주의 맥락에 너무 꽁꽁 갇혀버리지 않았어요?

C 추상이야말로 가장 개인적인 것이자 경제적인 것으로 환원돼 버렸죠. 미술시장의 참치요, 투 쁠 한우. 추상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에요. 오브제로서 혹은 물질로서 존재하기에 거래되는 미술품과는 달리, 개념은 사고팔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추상화는 자본에 저항하는 것이고, 정치 경제의 흐름을 거스를 수 있다고 믿었던 시기도 있었어요. 그러나 이후 남은 것은 무엇인가요. 자본은 개념조차, 물질이 아닌 것조차 상품화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확장성의 증빙이죠. 아닌 작업도 있겠지만, 적어도 주류 추상에 투영되는 건 예술적 실험성이기보다는 자본주의가 어디어디까지 팔 수 있느냐를 보여주는 자본주의의 실험성이죠. 사실 요즘 추상하면 상업적인 미술에 가장 앞장서 있는데….

U 첨병이죠.

C 아트엔터테이너를 싸잡아서 욕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흔히 이들이 미술에 뛰어들 때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미술적 장르가 추상인 것도 인상적이에요. 그만큼 추상은 비평이 불가능한, (더 못되게 얘기하면) 불필요한 텍스트가 되었음을 증명하는 것 아닐까요. 이때 비평은 미술을 감성으로 환원시키거나, 작가 개인사의 반영으로 이해하거나, 미술사적 맥락에서 어디에 위치하고 연결시키는 텍스트를 말하는 건 아니에요. 외려 그 너머, 작품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진실 혹은 세계란 무엇인지 말하는 선언이죠, 오늘의 추상화는 형식이나 사조, 그밖에 우리가 염두에 놓는 화가로서 조건을 다 차치하고 나서라도, 해석 불가능성이란 촉매를 가지고 미술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데 굉장히 용이해진 장르가 되다 보니까 상업성과 굉장히 밀접해진 거죠.

U 추상을 소유할 순 없을 거다 식으로 말하는 것도 다분히 낭만적 태도였던 것 같아. 어쨌든 추상화도, 그를 촉발하는 액션도 (중첩적인 의미에서)프레임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유통되지 못할 리가 없고, 자본주의는 감정도 약물로 손쉽게 치환해서 처방하니까요. 모든 것이 속류 유물론적인 세계 안에서 평탄해졌죠. 추상이 이전엔 개념과 닿아있었다면 이젠 감각과 더 친밀하다는 인상을 받아요. TPO를 아는 센스쟁이 소품? 저는 안 그래도 회화 경멸하잖아요. 그래서 회화전도 열고.

C 추상 얘기 그만합시다. 매체 얘기가 오늘 특히 재미없네.

U 영화 얘기나 할까요? 코로나 이후에 기후위기에 대한 인식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많이 바뀌었잖아.

C 맞아요. 영화 보는 경험이 바뀌었어요.

U 개인적인 얘기를 하죠. 나부터 할게. 나는 영화라는 게 이제 영화관에서 본다는 것 자체가 생소한 게 돼버렸어. 블랙박스 안의 영상이 경험적 소수가 돼버렸고 집에서 85인치 TV로 보거나 차 안에서 봐요. 요즘 출퇴근이 편도 1시간 40분이거든요. 딱 영화 한 편 플레이타임이니까 틀어놓고 밟아요. 그러니 이제 이미지는 꿈이 아닌 기시감 같은 게 되어버렸고, 보는 게 아니라 듣는 게 돼버렸어요. 소리로 숏을 상상하면서 가요. 근데 숏이 아름다운 영화는 그냥 손에 쥐고 보면서 가요. ⟨애프터썬⟩이나 ⟨아웃 오브 아프리카⟩같은 영화를 튼다면 대책 없이 그래야 하죠. 죽음을 각오한 관람? 죽여주는 영화가 있다면 끝내주는 일이겠죠! ⟨플로리다 프로젝트⟩같은 영화의 결말이라면 못 보고 죽었을 때 원혼이 되어 그걸 보는 인간들에게 빙의하겠지만, 별 수 없죠. 이러다 누굴 친다면? 글쎄요. 직장에서 사람 많이 살려왔으니까 천국의 문이 완전히 닫히진 않았을 거에요. 괜찮아요. 사실 전부 농담이니까^^

C 농담 맞죠?

U 어쨌든 영화가 재생되는 장소가 변했다는 거죠. 카세티의 방식으로라면 이런 걸 긍정할 수가 있어. 우리는 영화에 대한 관념에 대해서 논의해 왔던 거니까. 영화가 끊임없이 자기 형태를, 스스로를 상연하는 장소를 변형하는 거는 누군가의 영화사, 누군가의 관념 안에서는 긍정될 수도 있어요. 자네는요?

C 영화를 보는 방식이 바뀌었다는 것에 동의하죠. 저번 화에서 영상을 미술관에서 보는 것과 영화관에서 보는 것이 다르다고 말했잖아요. 그때 얘기했던 주제가 블랙박스엔 자유가 없고, 화이트 큐브엔 몰입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블랙박스는 늘 정해진 시간이 있으면서,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고, 자리의 이동을 허락하지 않고, 자신만을 쳐다보게 하는 어둠이 지배하는 독재적인 공간이죠. 이 비민주적 공간이 만드는 몰입은 늘 영화의 축으로서 미학적 파괴력을 촉진시켰어요. 그러나 이제 이런 것들은 불가능해졌어요. 우리가 쇼츠 얘기도 했지만, 이제 문해력뿐 아니라 영상조차도 2시간 넘는 시간 동안 무언가에 집중한다는 게 어려워요.

U 힘들죠.

C 지금은 OTT 서비스를 통해 언제든지 영상을 멈추고 다시 돌려볼 수 있고, 심지어 보기 싫은 장면은 건너뛸 수 있잖아요. 당연히 벤야민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 그는 제의적인 장소에 있었던 미술품이 미술관으로 오면서, 또 미적 대상이 극장이라는 일상 공간에서 마주치게 되면서 상실하는 아우라에 기대를 걸었잖아요. 그 틈 바구니 안에서 어떤 시민성, 정치성이 출연할 것이라고요. 지금 OTT는 영화가 가지고 있던 일말의 아우라마저 탕진시켜요. 그러나 그 결과는 다르게 나타났어요. 비판적인 대중이 출연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수용적인 대중이 출연했죠. 더 빨리, 더 쉽게 무언가를 섭취하려고 하는. 그런 측면에서 영화가 갖고 있던 정치적 매체성은 이미 너무 많이 희석됐다고 얘기할 밖에요. 영화 비평 역시 미술 비평과 비슷해지지 않았나요. 영화의 디테일들을 찾아내는 데 급급하고, 오마주를 포함해 과거 작품과의 관계를 이어보고. 이런 수준에서 형식주의적이거나 내재적 비평 차원에서 머물러버리니까 영화 자체가 매체로서 지닌 파급력과 파괴력은 굉장히 찾기 어렵지 않나.

U 확실히 그래요. 원하면 되돌려서 볼 수 있으니까 때론 영화가 중지된 기분이에요. 한 눈을 팔아도 손해 보는 일이 아니게 되었죠.

C 오늘날, 누구도 영화 감상을 취미라고 적어내지 않는 시대잖아요. 아니 그렇게 말해봤자 아무도 그것을 진짜 취미로 보지 않잖아요. 영화를 좋아한다는 게, 타인과 구별되는 미적 취향, 판단을 드러내지 못하니까요. 그게 영화의 본질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통용되는 틀 안에서 영화는 가장 통속적이니까. 이제 더 이상 영화는 대문자로 쓴 미적 감상의 범주에서 안 들어가는 게 아닐까.

U !!!

C 영화인들이 잘하니까 얘기하는 거죠. 봉준호 감독이 <옥자>를 넷플릭스에서만 개봉을 하겠다고 했을 때 사실 어마어마한 비판을 받았잖아요. 블랙박스를 거치지 않은 영상이 영화로 성립할 수 있는지부터 묻는 존재론부터, 당시에는 진보성을 띠었던 넷플릭스를 통해 자본화되지 않은 영토에서 영화를 소환하는 상징처럼 느껴지기도 했고요. 물론 이건 감독의 메시지하고도 연결된 해석이죠. 어떤 카르텔에 대한 공격이기도 했잖아요.

U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 느낌이긴 하지만요.

블랙박스가 가지고 있었던 어떤 위력을 OTT에서 어떻게 생산해 낼 수 있는지는 아직까지 대답하기 어려워요.

U 한편으론, 얼마 전에 디즈니 플러스가 오래된 콘텐츠 보관비용이 부담돼서 싹 다 삭제해 버렸다는 기사를 봤어요. 그걸 보면서 플랫폼은 아카이브가 될 순 없구나 싶더라고요. 듣자 하니 지금은 사라진 누누티비는 ⟨잔느 딜망⟩이나 ⟨바이올런스 잭⟩도 갖고 있었다더군요. 생각이 많아지네요.

<아웃 오브 아프리카>, 시드니 폴락, 1985, 한 장면.

이미지와 데이터

U 이미지라는 게 옛날에야 빛을 노출해서 상을 얻어냈기에 현실의 지표로 기능했고, 이젠 데이터로 변한 지 오래됐잖아요. 그래서 새삼 의아하긴 한데, 이런 생각도 들어요. 우리가 서른을 막 지났으니 최근 10년의 작업들을 집중적으로 본 셈이잖아요. 백 년 뒤면 2010년대의 작업은 다섯 개만 봐도 많은 걸 수도 있죠. 나머지는 죄 아카이브적 무의식 속에 처박혀서 기독교적 부활처럼 인양되기만 기다릴 거예요. 그러니 유실되는 게 나쁘진 않죠. 신체도 죽으면 원자가 되어 저 해방적 우주로 찬란한 여행을 떠나니까요.

C 클래식이 위대한 이유는 그들이 위대한 게 아니라 위대한 이미지만 살아남았기 때문이죠.

U 맞아요. 그래서 이미지와 데이터라는 키워드도 우리가 “이거 오래됐잖아요.” 식으로 말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한 500년 뒤에는 어쩌면 1990년부터 2040년까지 한꺼번에 묶을 수도 있고 역사가 재구성됨에 따라서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이 한데 묶일 수도 있으니까. 문득 아까 리얼리즘, 초현실주의, 형식주의 다 까놓고 머쓱하네요. 전 이미지와 데이터에서는 ‘와’가 동시대 미술의 키워드라고 생각해요. 호환성이요. 호환성은 간매체, 퓨전, 믹싱 모두와 달라요. 상호 불가촉한 것들의 접선을 허락하죠. 간매체, 퓨전, 믹싱 등의 형식에 변증법적 논리가 통했었다면, 호환성은 잘 모르겠어요. 어떤 예기치 못한 것을 촉발시키지 않은 채 그저 덧대어지고 있을 뿐이라는… 상호 연관될 수 없던 모든 것들이 연결되는 큰 흐름의 일부처럼 여겨지기도 하고요.

C 동시대적 이미지의 특징은 이모티콘이 되어버렸다는 얘기를 많이 하죠. 우리가 이미지를 ‘읽기’라는 낱말과 연관시킬 때 그것은 이미지의 외부를 상상하는 방식이에요. 한 이미지는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놓일 풍경과 세계, 서사를 읽어내도록 요청해요. 화면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어느 곳에서 등장해서 여기까지 왔고, 또 이 배경은 어느 방식으로 다른 곳까지 이어질 것이다라는 것 같은. 우리는 그 이미지의 대상은 물론 그와 함께 딸려 오는 거대한 세계와 만나는 거에요. 근데 동시대 이미지는 어떤가요? 보는 순간의 미감과 그것이 전달하는 감성에서 종결될 때가 많아요. 그 뒤에 어떤 세계가 도사리고 있다고 느끼긴 어려워요.

U 하이데거가 말한 고흐의 구두가 생각나네요.

C 그렇죠. 하이데거의 말처럼 우리는 낡은 구두에 엉킨 흙 한 줌을 보지만 그와 함께 거대한 ‘세계’가 함께 딸려 나와요. 반대로 이모티콘은 우리에게 그저 기호로 사용될 뿐, 그 캐릭터가 어디서 왔을지, 어떤 배경을 갖고 있을지 물음하는 방식으로 감상자를 자극하지 않아요. 동시대에서 이미지는 프레임에 한정된 상황과 기분을 나르는 밈과 다르지 않게 된 것이죠.

U 그럼 외려 이미지가 세계라는 데이터를 더이상 로딩할 수 없게 되어버린 거군요. 새삼 이런 상황에서 이미지를 역사화하는 일이 위력적일까 싶을 때가 있네. 즉자적 이미지의 무한… 이 안에서 비평가의 역할은 뭘까요? 안락사? 글쎄, 이런 존재론적 질문은 졸업해야겠죠. 내적 성찰로 얻을 수 있는 답은 아닐 테니까요. 

<You Have No Enemies> Poem by Charles Mackay

[1] 「새로운 리얼리즘에 관하여」, 보리스 그로이스, 2016. 출처: http://tigersprung.org/?p=2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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